[그립습니다] 정성필 씨 모친 이순남 씨

입력 2020-11-15 14:17:29 수정 2020-12-10 11:26:02

고생 참 많이 하신 '옴마'…온 동네 일 안 해본 논밭 없어
형편 조금 나아지고 행복해질 무렵 우리 곁 떠났습니다

새해를 맞아 정성필(가운데 아래) 씨와 어머니 故 이순남 씨(오른쪽 두번째) 가족, 친척이 찍은 기념촬영.
새해를 맞아 정성필(가운데 아래) 씨와 어머니 故 이순남 씨(오른쪽 두번째) 가족, 친척이 찍은 기념촬영.

옴마, 참 오랜만에 불러봅니다. 난 지금껏 엄마를 옴마라고 부릅니다.

우리 옴마 이순남 여사님은 고생도 참 많이 하셨습니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고 행복해질 무렵, 2007년 82세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옴마는 1926년에 그런대로 사는 외갓집에서 태어나 19세가 되던 1945년 어느 중신아비 말만 믿고 우리집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오고 보니 재산이 조금 있다던 중신아비 말은 전부가 거짓말이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옴마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 또한 부지런한 분이라 가정의 웃음은 언제나 행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이도 둘 태어나고 한참 재미있을 무렵, 6·25라는 전쟁이 일어나 우리 집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습니다.

전쟁을 피해 피난을 다니던 중 한참 귀엽고 재롱부리던 두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있을 때 생각도 않던 아버지의 군대 입대 영장. 전쟁이 한창이라 연기도 면제도 어떤 방법도 없어 입대하게 되었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아버지가 입대하고 10개월 정도 되었을 때, 휴전되어 제대를 빨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 일 없이 제대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40세, 옴마가 37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위암이라는 큰 병을 갖게 됐습니다. 수술은 커녕, 날이 갈수록 아버지께서는 음식을 드시지를 못해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2년 고생 끝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모든 일은 옴마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연세 높으신 할아버지, 할머니, 어린 우리 삼 남매. 아버지 약값으로 여기저기 빌려 쓴 많은 빚, 옴마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슬픔에만 젖어 있을 수가 없는 옴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의논 끝에 재산목록 1호인 초가삼간을 팔기로 했습니다. 집값으로 나락(벼)을 받던 날 우리 집 마당엔 많은 사람이 나락을 받기 위하며 모여들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방안에서 방문도 열어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앞세우고 집까지 팔아야 하는 심정 그 누가 알겠습니까? 집을 팔아 빚은 갚았는데 우리 식구들이 갈 곳이 없었습니다. 셋방살이를 했습니다. 그 어려운 살림 살이었지만, 옴마는 항상 긍정적이고 강인했습니다. 온 동네 논과 밭에 일을 안 해 본 곳이 없었고, 무슨 일이든 돈이 되면 다 했습니다. 겨울이면 홀치기도 그렇게 많이 했습니다. 당시 60년대 중반 때는 겨울이 되면 채와 치이, 얼기미 등을 이고 지고 양팔에 매달고,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해가 질 무렵 우리 동네에 그분들이 와 하룻밤 자고 갈 수 있는 집을 물으면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가 안 계시고 우리가 어리다고 무조건 우리 집으로 보내었습니다. 옴마는 그 아주머니들이 오면 언제나 반기며 빨리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고, 저녁을 먹고 남은 식은 밥이나 죽, 삶은 고구마가 있으면 많이 잡수시라고 드렸으며, 이렇게 많은 물건을 이고, 지고, 메고 다니려면 얼마나 피곤하시겠노 하시며, 그 아주머니들을 아랫목 따뜻한 곳에 주무시게 하고 옴마는 항상 위쪽을 택했지요.

아침이 되면 우리식구들이 먹는 대로 아침을 꼭 먹고 가도록 하셨고 그 아주머니가 우리 집을 나서 동네 어귀를 돌아갈 때까지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고 그 아주머니가 안 보이시면 "아이고, 저 사람도 어쩌면 나와 똑같은 인생인지 몰라"하시며 안타까워하셨고, 한겨울이 지나면 이런저런 장사 아주머니들 5~6명은 우리 집에 자러 왔지만, 옴마는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지요.

60년 말.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우리 곁을 떠나시고 옴마는 대구라는 낯선 곳에 먹고 살기 위해 이사를 했지만, 도시에서 벌어 먹고사는 것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우리 삼 남매가 성장했고, 내가 결혼(1980년)하고 8년 뒤 조그마한 슬레이트집 하나를 샀는데, 도시의 집, 그것도 내 명의로 된 집에 이사하던 날 자그마한 마당 구석에 있는 수도에서 물이 철철 흘러나오는데 그 수돗물이 왜 그리 신기했던지요?

옴마가 잠깐 손자들 밥해줄 때 손자들이 반찬 투정하며 밥을 잘 먹지 않자 아이고 저래서 나중에 장가는 가겠나 했던 손자 수원이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재훈이는 아들만 둘. 옴마가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사랑스런 손자며느리와 차돌 같은 증손자, 귀여움이 만점인 증손녀에 최고의 행복을 느꼈을 텐데 옴마가 안 계시네요. 고생만 하시고 떠나신 옴마가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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