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레시피] 아이 캔 두잇, 유 캔 두잇, 위 캔 두잇!

입력 2020-11-07 21:49:18 수정 2020-11-08 19:58:38

영화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 바탕
영화 보는 내내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생각
"좋아!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 귀에 아른

*해당 영화의 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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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포스터.

'거대한 공룡에 맞서는 개미들의 이야기'

최근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 토익영어반>(이하 삼토반)의 줄거리를 간단히 나타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1995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삼토반>에는 3명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모두 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고 대기업인 '삼진그룹'에 입사한 8년 차 직원들이다. 여기저기 참견하기 좋아하는 일명 '오지라퍼' 이자영(고아성). 그녀는 "자영 씨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겠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뛰어난 업무 능력을 자랑하는 생산관리3부 소속이다. 또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역사부터 시사까지 다양한 지식에 박학한 마케팅부 정유나(이솜),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자 출신이지만 현실은 회계부에서 가짜 영수증 메꾸는 일을 맡는 심보람(박혜수). 이들은 모두 '커리어 우먼'이 되겠다는 커다란 포부를 안고 입사했지만 고졸 출신에 여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실무는커녕 커피 타기, 사무실 청소, 서류 정리 등 잡다한 업무들만 담당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오는데. 회사는 차별을 철폐하겠다는 명목 아래 세 달 안에 토익 600점을 넘기면 고졸 출신도 대리로 승진시켜주겠다는 공고를 내건다. 그리하여 이들을 위한 '영어토익반' 수업이 만들어지고 직원들은 매일 아침 열심히 토익 공부에 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영은 '상무의 짐을 가져오라'는 지시에 따라 남자 동료와 함께 지방 공장을 찾게 되고 우연히 공장 하수도에서 독극물인 페놀을 하천에 방류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냥 못 본 채 넘어가자는 동료와 달리 페놀로 인해 피해 입을 주민들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자영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상고 출신 회사 동기 유나, 보람과 함께. 이들 셋은 추적 끝에 회사 윗선에서 엄청난 페놀 방출량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정황을 발견하고 사실을 알리고자 하지만 권력 앞에서 그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증거 자료를 모으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결국 회사의 비리를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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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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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한 장면.

영화 <삼토반>의 줄거리는 1991년 실제 발생했던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당시 구미 공업단지 내에 위치한 두산전자는 페놀수지 생산라인으로 이어지는 파이프 관의 파손으로 인해 두 차례, 총 30여 t의 페놀을 하천으로 유출한다. 다량의 페놀이 옥계천을 거쳐 상수원인 다사 취수장으로 유입되고 대구·경북을 포함한 인근 지역 주민들은 악취가 나는 오염된 수돗물을 마시게 된다. 당시 당국은 대구지방환경청 공무원 7명과 두산전자 직원 6명을 구속하고 관계 공무원 11명을 징계하는 등 유례없는 문책을 내렸고, 그 사건은 환경 문제가 인간의 생존권을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회사의 비리에 맞선 용감한 직원들의 승리'라는 영화의 극적인 결말은 관객에게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선사한다. 현실에서 거대한 기업에 맞서 개인이 승리를 이뤄내는 일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결말보다 더 눈길이 갔던 것은 주인공 세 명이 이뤄낸 '성장'이었다. 탕비실에서 상사들의 커피를 타며 '12초 신기록'을 세웠다고 기뻐하던 주인공 자영이 동료들과 연대해 회사의 비리를 고발하고 (얼떨결이긴 하지만) 회사가 해외 자본에 넘어가는 일을 막아내고, 마침내 자아실현까지 이뤄내는 일련의 성장 과정들 말이다. 사건 후 이들은 모두 토익 시험에서 600점을 넘기고 대리로 승진한다. 자영은 베테랑 업무 능력을 실무 현장에서 발휘하고 유나는 회의에서 당당히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보람은 자신이 바라던 새 회계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뭉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저려온다. 아마도 그들에게서 현재의 내 모습, 나아가 20·30대 다수 여성들의 모습이 투영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입사했지만 어느새 열정은 희미해지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나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자조적인 상태에만 머무르도록 두지 않는다. 세 친구들의 성장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의 희망적인 내 모습을 그려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세 달 안에 토익 600점 맞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불평하면서도 아침마다 영어 공부에 열 올리는 직원들, 허드렛일이 아닌 자신이 진짜 원하는 업무를 맡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들, 또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에게 피해 주는 일을 막고자 하는, 불의에 대항하는 양심들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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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한 장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본다. 워라밸이 중요시되는 지금 이 시대에 90년대처럼 회사에 목숨 바치라는 '꼰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회사의 부속품이 아닌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로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성취를 이루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는 그런 우리에게 힘내라고, 우리가 해냈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고 곁에서 조용히 속삭여 준다. 유나의 상사이자 마케팅부 여자 부장이 버릇처럼 내뱉는 칭찬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좋아!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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