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횡단보도의 어르신들

입력 2020-10-17 05:00:00

김해용 논설실장
김해용 논설실장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란다." 사람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사람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추구한다. 노동도 그렇다. 목적도 의미도 없는 노동은 고문에 가깝다.

한때 서양의 감옥에서는 죄수를 골탕 먹일 때 무덤 파기 노동을 시켰다. "네가 죽으면 묻을 묘지를 파라"고 죄수에게 지시했다. 땀 흘려 구덩이를 파고 나면 원래대로 메우라고 시켰다. 이 과정을 끝없이 반복한다. 무의미한 노동의 반복에 죄수는 자아가 붕괴되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

노동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소명일 수 있다. '월리'라는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는 노동의 가치를 멋들어지게 은유한다. 월리는 황폐화된 지구에 남아 쓰레기를 치우는 로봇이다. 어느 날 이 쇳덩이 로봇에 자아가 생겨나는데 이 기적의 특이점을 만든 것은 수백 년간에 걸친 노동이었다.

요즘 횡단보도에서 교통 안내 일을 하는 어르신들이 부쩍 늘었다. 정부가 희망일자리 사업과 노인일자리 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펼친 결과다. 그런데 자동차 매연 속에서 깃발을 들었다 놨다 하는 노인들의 표정에 통 활기가 없어 보인다. 어르신들이 이 일에서 과연 보람을 느끼는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부가 재정을 쏟아부어 만든 공공근로 일자리들이 상당 부분 겹치거나 불필요한 일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 사정이 악화되자 일자리를 대거 만들겠다며 재정을 투입했지만 통계치 산정을 위한 보여주기식 일자리가 너무도 많아서 그렇다.

정책 입안자들이 예산을 쓰면서 고민은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기존의 사업에다 제목만 바꿔 단 뒤 일자리가 창출됐다고 자찬하는 것은 보기조차 민망하다. 공공 일자리 참여자들이 진짜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줄 요량이라면 어르신들이 보람과 성취감을 느낄 만한 일을 발굴하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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