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꽃 이승희(1965~ )
착한 사람들은 저렇게 꽃잎마다 살림을 차리고 살지,
호미를 걸어두고, 마당 한켠에 흙 묻은 삽자루 세워두고,
새끼를 꼬듯 여문 자식들 낳아 산에 주고
들에 주고, 한 하늘을 이루어간다지.
저이들을 봐, 꽃잎들의 몸을 열고 닫는 싸리문 사이로 샘물 같은 웃음과 길 끝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
해 지는 저녁, 방마다 알전구 달아놓고, 복(福)자 새겨진 밥그릇을 앞에 둔 가장의 모습,
얼마나 늠름하신지, 패랭이 잎잎마다 다 보인다, 다 보여.
시인이 좋아하는 꽃은 패랭이인가. '낮술' 이란 시에서 시인은 '패랭이 꽃잎 속으로 조그만 철대문이 열렸다. 하굣길 딸내미인가 싶어 슬그머니 들여다보는데, 바람이 등을 툭 치고 간다. 꽃이 파란 철대문을 소리 내어 닫는다. 등이 서늘하다'고 말하고 있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평소 즐기지도 않는 술을, 그것도 훤한 대낮에, 한모금한 시인이 그래도 정신 혼몽한 가운데 어린 딸을 애써 기다렸다는 것. 그러나 야속하게도 가난의 상징인 파란 철대문은 툭, 소리 내어 닫히고 시인은 이내 마음이 아프다. 패랭이처럼 착하고 선하게 살아왔건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쩌면 이렇게 짠한, 그리운 딸내미와 시인은 함께 살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 이것저것 다 잃은 나도 그랬다. 도무지 마음 붙일 데가 없어 부지런히 꽃밭을 일궜었다. 오래 묵혀 두었던 시골집 먼지를 털고 벽을 세우고 마당에 꽃밭을 가꾸었었다. 직업이나 시업(詩業)에 빠져 있을 때는 도통 관심이 없던 일이었다. 그 꽃밭 일구는 일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런 내 꼬락서니를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하나둘 건넨 꽃들과 나무들로 지난여름 내 꽃밭은 참으로 풍성했었다. 인터넷을 뒤지면 봄꽃, 여름꽃, 키 작은 꽃, 키 큰 꽃, 수십 종의 꽃이 한 봉투에 들어 있는 걸 어렵지 않게 구입해 뿌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꽃들은 어느새 싫증이 났다. 패랭이, 구절초, 마타리, 으아리 같은 꽃을 하나둘 나는 구해다 심기 시작했다.
'펴랑이'는 조선시대 신분 낮은 사람들이 댓개비를 엮어 사용했던 갓 이름이다. 패랭이는 그것과 생김새가 비슷해 처음에는 펴랑이로 불리다가 나중에 지금 우리가 아는 꽃 이름 패랭이가 되었다. 우리의 산에 들에 피는 꽃들은 다 이렇게 민중의 모습이고 삶을 닮았다. '패랭이꽃'을 보니 시인이 살고 싶었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호미를 걸어두고, 마당 한켠에 흙 묻은 삽자루 세워두고,/ 새끼를 꼬듯 여문 자식들 낳아 산에 주고/ 들에 주고, 한 하늘을 이루어'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해 지는 저녁, 방마다 알전구 달아놓고, 복(福)자 새겨진 밥그릇 앞에 둔 가장의 모습'으로.
이제 패랭이꽃은 다 지고 없지만 그 '여문 자식들' 다가올 겨울도 무사히 잘 나기를 빈다.

시인 유홍준: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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