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황병관(K2 성서점 대표) 씨 모친 故 조춘란 씨

입력 2020-10-04 15:30:00 수정 2020-12-10 11:19:51

2014년 9월 황병관(왼족 두번째) 씨와 조춘란(아래 가운데) 씨가 찍은 가족사진. 가족제공.
2014년 9월 황병관(왼족 두번째) 씨와 조춘란(아래 가운데) 씨가 찍은 가족사진. 가족제공.

어머니 가을이 됐습니다.

코스모스 핀 길을 지나갈 때면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구멍 나기 쉬운 문고리 둘레에는 이중으로 창호지를 바르는데, 어머니는 창호지 사이에 꼭 코스모스 잎사귀를 넣어서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저절로 느낄 수 있게 해주셨지요.

바쁘고 힘든 농사일을 하는 동안에도 가난한 삶의 곳곳에 정성과 여유, 문학적 서정을 빼곡히 묻어두시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수많은 전설과 속담 ,격언 소설 이야기로 어린 나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셨는데, 그게 모두 어머니의 독서량에서 나온 것임을 나는 서슴없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활자가 귀하던 그 시절에도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때거나 틈새가 있는 일을 하실 때는 항상 책을 들고 계시는 것을 보아왔으니까요. 새로 받은 교과서에 실린 시와 시조는 대부분 내가 이미 외우고 있는 것들이었는데, 다른 동무 아이들은 나처럼 그렇지가 못했답니다. 두말할 것 없이 모두 어머니의 운율을 듣고 저절로 따라 외우게 된 것들이었지요.

그리운 어머니!

어제는 기억을 떠올리려고 가족 SNS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병상일지를 뒤적이다가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습니다. 수시로 찍어서 올린 사진 속 어머니는 병색이 너무 완연했고 내 모습은 행복에 겨운 사람처럼 활짝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무더위가 찾아오기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병실을 찾고 의사와 상담하고 모든 증상을 체크했으면서도 정작 어머니의 고통은 조금도 나누지 못한 것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 사진에 박힌 대로 나는 그때 정말로 행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골 살림에 시어른과 우리 4남매, 여덟 식구를 뒷바라지 하시느라 셋째 아들인 나에게 어머니는 나만의 어머니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시절은 모두 다 그랬으니 누구라도 투정 부릴 일은 아니지요. 뒤늦게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두고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빗어드리고 볼을 어루만지며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너무 좋아서 그만 그런 사진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년 경산시 하양읍 한 코스모스 밭에서 찍은 조춘란 씨 생전모습. 가족제공.
2014년 경산시 하양읍 한 코스모스 밭에서 찍은 조춘란 씨 생전모습. 가족제공.

벌써 삼 년이나 지났군요. 어머니는 성공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좀 촌스러운 말일지 모르지만, 여자 하나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어떻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반대로 나는 어머니가 가문에 들어오셔서 우리 집안을 더욱 크게 일으키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항상 자랑스러워하시는 우리 4남매는 모두 어머니의 기도와 기다림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단 한 번도 재촉하신 적은 없지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하셨고, 방황하는 시기에도 책망하는 법 없이 오랜 기다림으로 인내하셨습니다.

병원에서 7월 8일 새벽에 천사가 머물고 간 자리처럼 깨끗하게 이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너무 그립습니다. 어머니를 뵌 적 있는 내 동무들은 모두 다 어머니에 관해서 한마디씩을 합니다. 생전에 구석구석 챙겨드린 고향의 어르신들도 어머니의 따뜻한 배려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고향의 교회는 어머니의 빈자리 때문에라도 더욱 그리워하며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우애 좋으신 외숙부는 물론이고 늙으신 고모는 어머니 얘기만 꺼내도 틀림없이 수도꼭지 같은 눈물로 장판을 적실 것입니다. 이곳에 남은 이들은 모두 다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그해 봄 동산병원 병동 근처 흐드러지던 벚꽃 길을 다시 한번 같이 걷고 싶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어머니의 말만 내내 들으며 걷고 싶습니다. 그런 지혜와 사랑, 인내심, 인자한 성품을 단 한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고 골수에 담아 묻어 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다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머니와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나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어머니의 부족한 아들이었지만 다시 만나는 그때는 여기저기 내어놓고 싶은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코스모스 향기처럼 은은한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조춘란)에게 셋째아들 황병관(K2 성서점 대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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