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피난 생활 중의 추석 이야기

입력 2020-09-28 14:16:26 수정 2020-09-28 17:44:32

조선 중기의 학자 오희문이 쓴 일기 쇄미록[국립진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조선 중기의 학자 오희문이 쓴 일기 쇄미록[국립진주박물관 제공]/연합뉴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민족의 명절 추석을 맞이하는 마음은 예전과 같지 않다. 추석과 함께 시작되는 민족대이동으로 코로나19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이번 추석만큼은 고향을 찾는 이동을 자제하고, 추석에 가족이 모여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간편하게 차례를 치를 것을 거듭 당부하고 있다.

전통 시대에 전염병이 유행하면 추석 제사를 지내지 않고 조용하게 보냈다.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조사한 일기 자료인 안동 하회마을 류의목의 '하와일록' 1798년 8월 14일의 기록을 보면 '마마(천연두)가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의논해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중기의 학자 오희문이 쓴 일기인 '쇄미록'에는 임진왜란 중에 추석을 보낸 모습들이 기록으로 나타난다. '쇄미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시작하여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목을 '쇄미록'이라 한 것은 시경의 '쇄혜미혜(瑣兮尾兮: 누구보다 초라함이여) 유리지자(遊離之子: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에서 인용한 것으로, 유리기(遊離記) 또는 피난의 기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592년 8월 15일의 기록을 보면 '산속에 머물며 바위 아래에서 잤다. 한밤에 큰비가 오기 시작해 밤새 그치지 않았다. 임시로 거처하는 장막에 비가 새어 쪼그려 앉은 채 아침을 맞았으니, 그 고생을 알 만하겠는가. 오늘은 추석인데 성 남쪽 산소에 차례 지내는 사람이 없으니, 상로(霜露)의 감회에 깊이 잠겨 애통함이 끝이 없다. 더구나 노모와 처자식은 지금 어디에서 목숨을 보전하고 있을까? 오늘을 생각하니 더욱 애통하구나' 하여 피난 생활로 추석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현의 사람이 오늘이 명절이라며 이곳 사람들이 먹을 떡과 술, 고기, 과일 등을 많이 가져왔다'는 기록에서는 간단히 음식을 맛보며 추석을 보낸 모습이 나타나 있다. 1593년 추석의 기록에는 '누이가 아버지의 신위 앞에 술, 과일, 떡과 구이, 탕을 갖추어 차례를 지냈다. 오늘은 바로 추석이다. 일찍이 생원(오윤해)으로 하여금 상경해서 광주 선산에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지냈는지 모르겠다'고 하여, 선산을 찾지 못하고 피난지에서 누이와 함께 차례를 지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1594년 8월 15일의 '오늘은 추석이다. 술과 밥을 준비하여 조부모와 죽전 숙부의 제사를 지냈다. 나머지 먼 조상님들까지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형편이니, 추모하여 슬퍼하는 마음은 있지만 어찌하겠는가'라는 일기에서도 피난지에서 추석 제사를 챙긴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1595년 추석에는 '닭 2마리를 잡고 탕과 구이 및 술과 과일, 떡, 안주 등의 물품을 차려 신위에 제사를 지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술과 안주와 과일, 밥과 탕 등을 준비해 왔다'고 하여 이웃과 함께 추석 음식을 주고받은 모습이 나타난다.

1596년의 추석에는 비가 오는 중에도 추석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보인다.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날이 개기를 기다려 묘사를 지내려고 했으나, 늦도록 비가 그치지 않는다. 또 날이 갤 조짐이 없어 부득이 산에 올라가서 돗자리로 상석을 덮고 제수를 차렸다. 먼저 조부모에게 올리고 그다음은 아버지께 올린 뒤 죽전 숙부에게 올리는 순서로 상하 3위의 진설을 끝내고 절을 올렸다. 삿갓을 쓰고 제례 행사를 혼자서 맡았는데, 옷이 모두 젖었다. 또한 기력이 다해 고달프다'고 하여, 빗속에서도 조상 제사를 챙기고 있다.

이어서 '물린 제수로 계집종 마금과 덕노의 아비 덕수의 묘에 망제를 지내게 했다'고 하여 집안 노비에 대한 제사도 챙겨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97년 추석의 기록에서도 '아침 식사 전에 인아(윤겸)와 함께 제사를 지낸 뒤 남은 음식으로 살아있을 때 공이 있었던 노비 중에서 자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자들의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하여 노비에 대해 배려를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1598년의 추석에는 '술, 떡, 과일, 포, 구이로 차례를 지낸 뒤에 온 집안 식구들이 함께 먹었다. 속절(추석)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웃 사람들이 모두 차례를 지내고 남은 좁쌀떡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전체적으로 '쇄미록'의 기록에서는 추석 제사를 챙기면서도 피난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 정승 이원익은 장례의 편의를 위해 가족묘를 조성하게 하고 제사의 간소화를 유언으로 남겼다. 한말의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은 나라가 독립을 할 때까지 소박한 제사를 지낼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코로나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인 만큼 추석에 담긴 의미는 이어받으면서도 그 절차들은 간소하게 하는 것이 어쩌면 합리적이고 융통성 있는 대안을 제시했던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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