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영국인의 삶에서 유머를 뺄 수 없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늘 유머가 깃들어 있다. 항상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유머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시간과 장소 따로 없이 인사와 이야기에 농담을 곁들인다. 그저 웃자고 하면서 "늘 진지할 필요는 없잖아?"하는 거다. 웃는 것이야말로 현재를 사는 거라며 "지금 안 웃으면 언제 웃겠느냐?"고 하는 거다.
영국인의 유머는 독특하고 미묘하다. 진지한 것과 장난스러운 것이 만나고, 경쾌함과 심각함이 어우러진다. 자신의 결점을 들추어 웃음거리로 만들고, 자기 인생을 마치 남의 것인 양 한 걸음 떨어져 가볍게 바라본다. '농담을 하는 듯해도 실제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고, 관심을 가진 듯해도 사실은 관심이 없고, 심각한 듯해도 정말 심각한 것이 아니'라서, 같은 언어를 쓰는 미국인도 그들이 언제 농담을 하는지 잘 모를 정도다.
여름마다 가서 지내는 영국 집에 도착해서 쓰레기통이 없다고 했더니, 집주인이 "요즘에는 투숙객들이 쓰레기통을 기념품으로 가져가나 보다"라고 한다. 한바탕 웃음으로 긴 여행의 피로가 누그러졌다. 친구들과 펍에서 점심을 먹고 나왔는데 비가 많이 내렸다. 남자들이 주차장에 차를 가지러 간 사이 여인들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비 맞은 채로 개를 끌고 들어왔다. 크고 무섭게 생긴 개를 보고 살짝 움츠리는데, "걱정 마요. 아침에 밥 먹였으니까"란다. 웃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말하는 영국식 유머다.
친구 미셸은 길치다. 일자리 면접에서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물었단다. 약점은 역시나 방향 감각이 없는 것. 면접을 마친 후, 면접관에게 어느 문으로 나가는지 물었단다. 면접관도 웃고, 미셸도 웃고, 그 얘기를 들은 나도 웃었다. 내비게이션을 사러 가서는 "바보 멍청이(idiot)도 쓸 수 있는 걸로 주세요"라고 말하고, 그걸로 샀다더라. 노인 돌보는 일을 하면서 가끔 케이크를 구워주기도 하는데, 할아버지가 감사의 표시로 돈을 꺼내줄라치면 "우리 남편보다 더 친절하시네요"라고 한다.
그들은 인생이 아이러니라는 것을 이미 아는 것 같다. 우스꽝스러운 유머로 인생을 비웃고, 놀리고, 비꼬고, 비튼다. 유머를 휴식 삼아 쉬어가면서 그때그때의 삶을 만끽한다. 드러내고 털어놓아 함께 웃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한다. 징징대고 불평하느라 시간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지 않는다. 웃음을 진지함보다 우위에 놓고, 인생이란 수선을 피울 일이 아니라며, 주어진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라 한다. 유머는 교양 있는 기술이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만 더' 행복하고 싶은 게 아닐까? 유머가 좀 더 자주 웃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웃음보가 터지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게 뒤죽박죽일 때도 호탕하게 껄껄 웃어넘기고, 걱정과 불안으로 앞이 캄캄할 때도 바보처럼 희죽 웃을 수 있다. "You can't win at everything but you can LAUGH at everything." 모든 것에 이길 수는 없지만 모든 것에 웃을 수는 있다. 웃음으로 승화된 인생이 성공이 아니라면 무엇이 성공이겠는가? 나의 행복에 이런 '소신'만 가질 수 있다면, 내가 바라는 행복은 가깝고도 단단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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