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백선엽과 만네르하임

입력 2020-06-09 21:03:38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칼 구스타브 만네르하임. 핀란드의 군인으로 '겨울전쟁'(1939.11.30~1940.3.13)에서 소련을 패퇴시킨 전쟁 영웅이자 제6대 대통령이며 2차 대전 후 소련과 협상으로 핀란드의 소련 합병을 막은 인물이다. 이런 공로로 핀란드에서는 '국부'로 추앙되고 있다. 만약 그가 이 땅에서 태어났다면 필경 추앙은커녕 '민족 반역자'로 매도당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핀란드는 러시아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자치가 허용됐는지, 러시아의 지휘 통제를 받는 핀란드군 장교의 양성이 목적이었지만 핀란드 군사학교가 있었다. 만네르하임은 여기로 진학했다가 적응을 못 해 퇴교당하고 러시아의 니콜라이 기병학교에 입학해 전교 10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러시아 황제 근위대 기병장교로 임관해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중장까지 진급했다. 한국으로 치면 일본 육사를 나와서 일본군 남방총군(南方總軍) 총사령부 병참총감까지 승진한 홍사익(洪思翊) 중장과 같은 행로를 갔다고 할까. 물론 홍 중장은 마닐라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으나 만네르하임은 러시아 2월 혁명 후 퇴역하고 핀란드로 돌아가 핀란드군 최고 지휘관으로 추대되는 영광의 '인생 2모작'을 일궜다는 근본적인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한국의 진보·좌파의 기준에서는 홍 중장도 마찬가지이지만(홍 중장의 생은 단순히 친일이란 잣대로 재단하기 어렵다는 국내외의 의견이 있었지만,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705명의 친일파 명단에 들어갔다) 만네르하임의 '친러' 경력은 그가 절대로 '국부'가 될 수 없는 조건이다. 핀란드 국민의 '민족정신'은 썩어 문드러진 것인가?

만네르하임이 핀란드 국민에게 받는 대접과 대비해 백선엽 장군의 처지는 참으로 가슴 아프다.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6·25 전쟁 영웅임에도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근무했기 때문에(하지만 그가 독립군과 전투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현충원에 묻혀서는 안 된다는 공격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 배은망덕한 세력이 판을 치게 됐는지 가슴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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