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3년 만에 6·25 참전 1953년 화살머리고지서 전사
"2006년 친형 유전자검사, 2019년 아들·손자 유전자 검사 덕분"
부인 이분애 여사의 꿈이 현실로
"열아홉에 시집 와 신혼 생활 3년 만에 남편과 떨어져 70년 가까이 홀로 사셨습니다. 어머니의 꿈 속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3일 입대해 휴전을 2주 앞둔 1953년 7월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의 유해가 철원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굴돼 68년 만에 가족의 품에 안겼다.
대구에 살고 있는 김 하사의 외아들 김대락(70) 씨와 부인 조영선(69) 씨, 그리고 김 하사의 손주 3명은 70년이 다 돼서야 남편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찾게 됐다.
무엇보다 19세에 결혼해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70년 애끊는 세월을 살아온 김 하사의 아내 이분애(90) 씨는 아직도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이 보고 싶다'는 남편에게 어린 김 씨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는 이 씨는 목이 메여 "얼마나 보고싶었을까…"라는 말조차 다 잇지 못했다.
눈동자에 새겨진 듯 각인된 남편의 모습과 1952년 전쟁통의 기억은 눈을 감아도 잊히지 않는다. 유품을 받아든 이 씨의 기억 속에서 70년 세월이 빠르게 되감기된다. 아들 김 씨와 며느리 조 씨의 도움을 받아 그 기억들을 다시 정리한다.
◆피붙이 아들과 신혼생활을 뒤로 하고 전쟁터로
김 하사는 결혼 3년 만에 부인과 18개월 된 아들과 헤어져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입대 당시에는 아내 이 씨와 결혼한 지 겨우 3년 된 신혼부부였다. 저녁이면 옆 동네 친정에 놀러 간 아내를 데리러 가 등에 업고 올 정도로 다정하고 애틋한 부부애를 자랑했다. 행복한 신혼을 보내던 어느 날 전쟁이 터졌고 전쟁은 신혼부부를 떼어놓았다.
당시 경북 포항 송라면에 살고 있던 김 하사의 아내 이 씨는 친정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갔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려 만나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은 부산에서 한 달간 여관방을 얻어 머물며 김 하사를 수소문했다. 이 씨는 매일 저녁 제주도 훈련을 마치고 배를 타고 육지로 들어오는 군인들을 붙잡고 남편이 언제쯤 훈련을 마치고 올지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한두 달을 기다린 끝에 남편을 본 것이 부부가 마주한 마지막이었다. 당시 장면을 회상하며 이 씨는 "아장아장 걷는 아들이 두 돌도 안 돼 헤어진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알아봤는지 낯도 안 가리고 품에 안기는 걸 보고 마음이 아렸다"고 했다.
면회를 다녀온 뒤에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만 갔다. 한동안 이 씨는 성인 남자 뒷모습을 보면 남편이라 착각하고는 '아빠, 아빠'하며 따라 다니기도 했다. 밤마다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삼키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김 하사는 기다리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3년 7월 13일, 휴전협정을 2주 앞두고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산화했다.
◆굳은 믿음과 노력 끝에 꿈이 현실로…"아버지를 다시 찾았다"
김대락 씨는 남편과 헤어진 뒤로 평생을 혼자 사신 어머니가 늘 소화불량과 화병에 시달렸다고 했다. 며느리 조영선 씨는 "어머니는 과부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신혼 때 헤어진 김 하사와 이 씨를 합장해 드리는 것은 온 가족의 염원이었다. 이분애 씨는 70년 세월을 남편 없이 지내며, 죽어서라도 남편 곁으로 가겠다며 화장해 뿌려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하곤 했다.
저승에서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였을까. 이 씨는 3년 전 치매 증상을 보인 뒤부터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진 남편 위패 아래 화병에 유해가 들어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가족들은 그 꿈을 실현시켜드릴 수 있어 너무나 다행이라고 한다. 김대락 씨는 "처음에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 알려드려도 잘 이해하시지 못했다"며 "지금은 두 분을 합장시켜드리겠다고 하니 기뻐하시고 생기를 되찾으셨다"고 했다.
김 하사가 가족 품으로 늦게라도 되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2006년 김 하사의 친형이 혈액 유전자 검사를 해놓은 덕이 컸다.
김대락 씨의 자녀들은 당시 '언젠가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지 않겠느냐. 대조 가능한 DNA가 등록될 수 있도록 해놓는 게 좋겠다'고 했고, 큰할아버지도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 지난해에는 아들 김대락 씨와 김 씨의 장남도 타액으로 DNA 검사를 했다.
'언젠가는 가족 품으로 유해가 돌아올 것'이라는 온 가족의 굳은 믿음과 노력 덕분인지 올 2월 국방부로부터 유전자 감식 결과, 김 하사의 가족이 확실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 씨에게 '남편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바로 전달하지 못했다. 조영선 씨는 "나중에 유골 찾았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역시나 잘 이해를 못하시더니, 최근 며칠은 그런 기운을 느끼셨는지 밤에 잠을 못 주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김대락 씨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말로 표현을 못할 만큼 가슴이 먹먹했다. 국방부 관계자와 유해발굴단 군 장병들에게 감사하다"며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아직 유해를 못 찾고 있는 전사자의 가족이 많을 텐데 더 많은 유해가 가족 품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고 했다.
김대락 씨 부부는 "주변 친구들은 여태 부모를 모시다가 이제 돌아가시는 거지만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이제야 다시 찾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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