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만에…남편 유해 안은 구순 아내의 눈물

입력 2020-06-03 18:23:55 수정 2020-06-04 10:19:41

신혼 3년 만에 6·25 참전 1953년 화살머리고지서 전사
"2006년 친형 유전자검사, 2019년 아들·손자 유전자 검사 덕분"
부인 이분애 여사의 꿈이 현실로

3일 대구 남구 앞산 충혼탑에서 열린
3일 대구 남구 앞산 충혼탑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에서 부인 이분애 씨가 남편인 고(故) 김진구 하사의 영정에 참배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1953년 7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의 아내 이분애(90) 씨.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1953년 7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의 아내 이분애(90) 씨.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열아홉에 시집 와 신혼 생활 3년 만에 남편과 떨어져 70년 가까이 홀로 사셨습니다. 어머니의 꿈 속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3일 입대해 휴전을 2주 앞둔 1953년 7월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의 유해가 철원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굴돼 68년 만에 가족의 품에 안겼다.

대구에 살고 있는 김 하사의 외아들 김대락(70) 씨와 부인 조영선(69) 씨, 그리고 김 하사의 손주 3명은 70년이 다 돼서야 남편과 아버지, 할아버지를 찾게 됐다.

무엇보다 19세에 결혼해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70년 애끊는 세월을 살아온 김 하사의 아내 이분애(90) 씨는 아직도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들이 보고 싶다'는 남편에게 어린 김 씨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는 이 씨는 목이 메여 "얼마나 보고싶었을까…"라는 말조차 다 잇지 못했다.

눈동자에 새겨진 듯 각인된 남편의 모습과 1952년 전쟁통의 기억은 눈을 감아도 잊히지 않는다. 유품을 받아든 이 씨의 기억 속에서 70년 세월이 빠르게 되감기된다. 아들 김 씨와 며느리 조 씨의 도움을 받아 그 기억들을 다시 정리한다.

◆피붙이 아들과 신혼생활을 뒤로 하고 전쟁터로

김 하사는 결혼 3년 만에 부인과 18개월 된 아들과 헤어져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입대 당시에는 아내 이 씨와 결혼한 지 겨우 3년 된 신혼부부였다. 저녁이면 옆 동네 친정에 놀러 간 아내를 데리러 가 등에 업고 올 정도로 다정하고 애틋한 부부애를 자랑했다. 행복한 신혼을 보내던 어느 날 전쟁이 터졌고 전쟁은 신혼부부를 떼어놓았다.

당시 경북 포항 송라면에 살고 있던 김 하사의 아내 이 씨는 친정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갔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려 만나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은 부산에서 한 달간 여관방을 얻어 머물며 김 하사를 수소문했다. 이 씨는 매일 저녁 제주도 훈련을 마치고 배를 타고 육지로 들어오는 군인들을 붙잡고 남편이 언제쯤 훈련을 마치고 올지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한두 달을 기다린 끝에 남편을 본 것이 부부가 마주한 마지막이었다. 당시 장면을 회상하며 이 씨는 "아장아장 걷는 아들이 두 돌도 안 돼 헤어진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 알아봤는지 낯도 안 가리고 품에 안기는 걸 보고 마음이 아렸다"고 했다.

면회를 다녀온 뒤에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만 갔다. 한동안 이 씨는 성인 남자 뒷모습을 보면 남편이라 착각하고는 '아빠, 아빠'하며 따라 다니기도 했다. 밤마다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삼키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김 하사는 기다리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3년 7월 13일, 휴전협정을 2주 앞두고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산화했다.

1953년 7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의 아내 이분애(90) 씨가 남편의 사진을 만지며 그리워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1953년 7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의 아내 이분애(90) 씨가 남편의 사진을 만지며 그리워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굳은 믿음과 노력 끝에 꿈이 현실로…"아버지를 다시 찾았다"

김대락 씨는 남편과 헤어진 뒤로 평생을 혼자 사신 어머니가 늘 소화불량과 화병에 시달렸다고 했다. 며느리 조영선 씨는 "어머니는 과부라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신혼 때 헤어진 김 하사와 이 씨를 합장해 드리는 것은 온 가족의 염원이었다. 이분애 씨는 70년 세월을 남편 없이 지내며, 죽어서라도 남편 곁으로 가겠다며 화장해 뿌려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하곤 했다.

저승에서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였을까. 이 씨는 3년 전 치매 증상을 보인 뒤부터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진 남편 위패 아래 화병에 유해가 들어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가족들은 그 꿈을 실현시켜드릴 수 있어 너무나 다행이라고 한다. 김대락 씨는 "처음에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고 했을 때 어머니께 알려드려도 잘 이해하시지 못했다"며 "지금은 두 분을 합장시켜드리겠다고 하니 기뻐하시고 생기를 되찾으셨다"고 했다.

김 하사가 가족 품으로 늦게라도 되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2006년 김 하사의 친형이 혈액 유전자 검사를 해놓은 덕이 컸다.

김대락 씨의 자녀들은 당시 '언젠가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지 않겠느냐. 대조 가능한 DNA가 등록될 수 있도록 해놓는 게 좋겠다'고 했고, 큰할아버지도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 지난해에는 아들 김대락 씨와 김 씨의 장남도 타액으로 DNA 검사를 했다.

'언젠가는 가족 품으로 유해가 돌아올 것'이라는 온 가족의 굳은 믿음과 노력 덕분인지 올 2월 국방부로부터 유전자 감식 결과, 김 하사의 가족이 확실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 씨에게 '남편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을 바로 전달하지 못했다. 조영선 씨는 "나중에 유골 찾았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역시나 잘 이해를 못하시더니, 최근 며칠은 그런 기운을 느끼셨는지 밤에 잠을 못 주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김대락 씨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말로 표현을 못할 만큼 가슴이 먹먹했다. 국방부 관계자와 유해발굴단 군 장병들에게 감사하다"며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아직 유해를 못 찾고 있는 전사자의 가족이 많을 텐데 더 많은 유해가 가족 품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고 했다.

김대락 씨 부부는 "주변 친구들은 여태 부모를 모시다가 이제 돌아가시는 거지만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이제야 다시 찾았다"고 했다.

1953년 7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의 아내 이분애(90) 씨.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1953년 7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故 김진구 하사의 아내 이분애(90) 씨.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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