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세상 읽기] 인생은 ‘새옹지마’

입력 2020-04-26 06:30:0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가 16일 오전까지 이어진 가운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송사 조명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 연합뉴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가 16일 오전까지 이어진 가운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송사 조명이 환하게 비추고 있다. 연합뉴스
전경옥 언론인
전경옥 언론인

코로나19가 정신 못차릴만큼 우리를 뒤흔들어대더니 이번엔 4.15 쇼크인가. 총선 당일 개표 뉴스를 보다 TV를 꺼버렸다. 예상은 했지만 마음이 심란했다. 이튿날 확인된 결과는 '압승'과 '대참사'. 게다가 '저 사람만큼은 곤란해'라고 꼽았던 몇몇 후보들이 당선돼 환호작약하는 장면엔 시쳇말로 '어이상실'이었다.

열불이 났다. 연락 닿은 지인들의 목소리에도 화기(火氣)가 타다닥 타오르고 있었다.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다는데 의기투합한 셋이서 동네 뒷산에 올랐다. 실핏줄처럼 갈래진 숲길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했더니 파도치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자연의 치유력을 새삼 실감했다. 서울의 B여사는 일흔 중반의 할머니다. 광화문 집회는 물론 태극기 집회에도 열심히 참가했던 열혈파. 개표 상황에 화가 치솟은 나머지 새벽 5시에 근처 산으로 달려갔다. 인적 없는 캄캄한 산길을 정신없이 올라가다보니 산꼭대기더란다. 그제서야 "아이고 내가 미쳤구나!" 생각이 들면서 무섬증이 밀려오더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선거만큼 가슴조린 적 없다고들 한다. 양대 진영이 극한 대립한 탓이다. 그바람에 애먼 민초들마저 덩달아 갈라지는 양상이다. 지역적으로 나뉘는데다 혈육간에도 선거 얘기만 나오면 서먹해지고, 수십년 우정도 골이 패곤 한다.

중국 무협물에는 온갖 유형의 무림(武林) 고수들이 등장한다. 은원(恩怨), 즉 은혜와 원한을 둘러싼 복수와 보은의 키워드가 씨줄날줄로 엮여진 가운데 강호(江湖)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문파들간 혈투가 펼쳐진다. 모략과 권모술수, 배신이 난무한다. 황당하기도 하고, 권선징악의 뻔한 줄거리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정의가 불의를 이긴다는 점에서 통쾌함을 안겨준다.

무협물에는 흔히 정파와 사파‧마교가 대립한다. 절대 서로를 용납하지 않으며 배척한다. 재작년 타계한 진융(金庸)은 중국 무협소설계의 거물이다. 프랑스 정부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영국의 대영제국 훈장까지 받았다. 진융 작품들 중 천하의 명검인 의천검과 도룡도를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세력 다툼을 다룬 '의천도룡기'에도 예외없이 정파와 사파‧마교가 등장한다. 서로를 증오하는 상황 속에서도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연인들이 등장한다. 대개는 비극적 최후로 끝나지만.

이번 총선판이 내 눈엔 한 편의 무협물 같다. 꼼수와 계략이 난무하는, 그다지 재미있지도, 통쾌하지도 않은…. 평범한 유권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무시한' 특권과 명예, 두둑한 연봉이 약속된 금배지를 놓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B급 무협물에 다름아니다. 피가 튀고 살점이 흩날리는 한바탕 혈전 끝에 승패는 갈라졌다. 승자는 천하가 제것인양 기고만장하고, 패자는 바닥모를 심연으로 빠져든다. 유권자들 또한 한쪽에선 쾌재를, 다른 한쪽에선 상갓집 문상객처럼 침울한 낯빛이다.

더불어민주당과 비례정당 더불어시민당이 21대 총선에서 단독으로 국회 전체 의석(300석)의 5분의 3에 해당하는 180석을 확보할 전망이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과 비례정당 더불어시민당이 21대 총선에서 단독으로 국회 전체 의석(300석)의 5분의 3에 해당하는 180석을 확보할 전망이다. 연합뉴스

서쪽의 파랑과 동쪽의 분홍, 그 선명한 색깔 대비도 우리를 가슴 아리게 한다. 사실 어느 나라든 정도 차이는 있지만 지역 감정이라는게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 중국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가 그러하다. 중국의 두 도시 경우 베이징은 수도라는 자부심으로, 상하이는 경제적 위상으로 서로가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다. 지역적 특성이 희화화 되기도 한다. 상하이 사람들은 베이징 사람들을 가리켜 "허세부리고 잘난 척 한다"며 비꼬고, 베이징쪽은 상하이쪽을 향해 "돈만 밝히는 천박한 사람들"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두 도시의 지역 감정에는 한자락 유머 코드가 깔려 있어서 우스개 소재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총선‧대선 때마다 지역감정이 요동치기 일쑤이다. 정치권이 화력 높은 지역감정 카드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환호와 탄식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의 내상(內傷)을 입는 민초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진영에 따라 형성된 크고 작은 집단들이 상대를 향해 퍼붓는 비난과 조롱, 막말, 심지어 아니면 말고식 음해까지 그 정도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4.15 총선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 국회사무처가 국회 의원회관 국회의원 종합상황실에서 21대 국회의원 배지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4.15 총선을 이틀 앞둔 13일 오전 국회사무처가 국회 의원회관 국회의원 종합상황실에서 21대 국회의원 배지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고용정보원 최근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연봉이 1억4000만원이라 한다. 국민 1인당 GDP의 4.4배 가량이다. 우리보다 훨씬 부유한 미국은 2.9배, 영국은 2.61배, 프랑스도 2.53배에 불과하다는데…. 한국 국회의원은 고소득 직업 2위에다 누릴 수 있는 특권만도 200 가지가 넘는다나. 이러니 금배지에 필사적으로 목을 매나 보다. 반면 세비에 비해 얼마만큼 효과를 내고 있나 분석한 조사에서 한국 국회의원은 27국 중 26위에 그친다. 꼴찌 수준이다. 이런 금배지족의 당락에 왜 우리 풀뿌리 백성들이 환호하고 앙앙불락해야 하나. 사실 민초들에겐 금배지족의 200여 가지 특권이 25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은하마냥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상상조차 안되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닥칠지 모를 대공황 우려 속에 먹고 사는 문제만이 태산의 무게로 다가올 뿐.

심술궃은 꽃샘 추위에 울울한 심사를 달래고 있는데 친구가 엽서를 보내왔다. 이심전심이련가. '마음도 흐리고 날도 흐리고~. 마음을 다스리고 가라앉히려 마음을 헤집어 빨래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후덜덜해진 마음을 꺼내어 심산유곡 맑은 물에 훌훌 씻어내고 싶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다. 화(禍)가 복(福)이 되고, 복이 화가 된다고 했다. 21대 국회의원들은 부디 진짜배기 금배지 활동을 하기를….

전경옥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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