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로 통제 안되는 도벽, 술, 마약 등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입력 2019-12-17 12:30:00

본능, 무의식 작용하는 욕구 저하시키는 새로운 중독 치료 '조건반사제어법'
일본에서 반복되는 문제 행동 치료법으로 각광…알코올, 마약 환자 50~60% 성과

대동병원의 조건반사제어법 유사단계 치료실 내부. 환자가 실제 중독과 관련된 자극 물건을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충동이 증가하지만 보상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욕구는 줄어든다.
대동병원의 조건반사제어법 유사단계 치료실 내부. 환자가 실제 중독과 관련된 자극 물건을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충동이 증가하지만 보상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욕구는 줄어든다.

#20대 후반에 아이를 유산하고 난 뒤 40년 가까이 도벽과 우울증으로 시달린 60대 여성. 젊었을 때부터 대학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소하게 물건을 훔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재판에 계류된 사건도 많았고 치료감호소에도 2차례 다녀왔다.

그러다 지난해 3월부터 '조건반사제어법'이라는 치료법을 소개받고 올해 1월까지 입원 및 외래 치료를 하면서 도벽에 대한 충동과 우울감이 현저히 줄었다. 그녀는 "예전에 대형마트에 가면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물건을 갖고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는데, 지금은 '예쁘네, 다음에 사야지'로 바뀌었다. 마지막 치료라는 생각으로 조건반사제어법에 매달렸고, 다행이 지금은 물건을 봐도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했다.

중독 치료에 대해서는 그동안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환자 상담을 중심으로 설득하고 교육하는 인지행동치료가 중심이었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중독이 우울, 불안감 등의 증상을 동반하기에 이에 대한 대증 치료를 보조적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중단하려고 결심했던 행동이 반복되는 것은 '회복은 되었지만 치유는 아니다'라고 불린다. 이에 중독 행위를 일으키는 본능과 무의식에 관심을 두는 '조건반사제어법'(CRCT·Conditioned Reflex Control Technique)이 더 나은 치료 성과를 거두고 있어 새로운 치료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병원인 대구 대동병원(병원장 박상운)은 지난 7일 국내 최초로 정신건강 의료진, 전문 상담요원 등을 대상으로 조건반사제어법을 소개하는 한국 연수회를 개최했다.

◆ '의지가 약해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은 착각

2016년도 국가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따르면 국민 25.4%(남성 28.8%, 여성 21.9%)가 평생 한번 이상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1년간 정신질환 유병률은 11.9%(남성 12.2%, 여성 11.5%)로 470만명이 정신장애를 겪은 것으로 추산된다.

알코올 및 니코틴 사용장애, 조현병 스펙트럼장애, 기분장애, 불안장애 등을 망라하는 정신질환 중에서 중독에 대한 치료는 사실상 방치해 왔다. 사회는 알코올이나 마약뿐만 아니라 스토커, 몰카 등 성적 문제, 도벽, 식이장애, 자해 등 광범위한 '중독 사고'에 대해 행위 자체에만 문제를 삼아 왔다.

지금까지는 생각을 바꿈으로써 행동을 바꾼다는 인지행동치료로 접근했다. 예컨대 상대방 눈빛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이 들어 그를 공격했다면, '그 사람이 딴 생각을 하는구나'로 긍적적으로 인지를 바꾸서 행동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또 뇌에 작용하는 욕구를 줄여주는 항갈망제를 사용하는 약물치료가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의식에 개입하는 인지치료는 중독 개선 효과가 미미하다는 한계를 나타냈다. 중독환자에게 아무리 교육을 통해 결심을 단련시켜도 막상 눈 앞에 술, 마약을 보면 대체로 굴복하고 만다는 것. '이성적인 뇌'만 강조하고 집중하는 대신에 본능, 무의식을 관장하는 '동물적인 뇌'를 억제해야 근본적인 중독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동병원 박상운 병원장은 "누구나 마음 속에는 동물적인 본능이 있지만 이성이 이를 억제해 왔다. 하지만 중독 환자에게는 이성으로 어쩔 수 없는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본인의 결심만으로 치료되지 않는다. 이는 환자 본인의 잘못이 아니고 병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건반사제어법 1단계
조건반사제어법 1단계 '키워드 액션' 말과 동작.

◆무의식에서 작용하는 욕구를 없애야 중독 치유

여러 치료법을 통해 문제 행동을 반복했던 사람의 생활태도나 사고방식이 어느정도 회복되는 것처럼 보여도 욕구는 치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그 욕구를 소거하고 치유된 상태로 이르게 하는 것이 조건반사제어법의 목표다.

어떤 행동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알면서도 반복하는 것은 모두 조건반사제어법의 적용 대상이 된다.

조건반사제어법은 일본 국립 시모사 정신의료센터 정신과 의사 히라이 신지가 2006년에 고안한 반복되는 문제 행동에 대한 새로운 중독 치료법이다. 수많은 다짐에도 문제행동이 반복되는지를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 이론을 통해 이해하고 개입한다.

처음에는 약물 중독환자를 대상으로 개발되었지만 10여년 동안 일본에서는 알코올, 마약 중독이나 스토킹, 몰카 등 성적 문제, 도박, 도벽, 식이장애, 강박증, 자해 등 행위 중독 전반에 대한 치료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조건반사제어법은 치료의 표적이 되는 행동의 작동을 멈추는 제어자극을 만들어, 그 행동을 촉진하는 반사 연쇄의 작동성을 약하게 하는 원리다.

기본적으로 ①제어 자극(Key Word Action 설정) 단계 ②유사(simulation) 단계 ③상상(recollection) 단계 ④유지(maintenance) 단계 등 모두 1~4단계로 진행한다.

먼저 1단계는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라도 개를 훈련하는 것처럼 이를 제어하는 '주문'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마약을 할 수 없다. 괜찮다"라는 주문을 특정 손짓과 더블어 20분 간격을 두고 하루 20차례 반복한다. 어떤 자극(주사기)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반사행동(마약 투여)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제어 효과를 준다.

2단계 유사의 목적은 치료에서 문제가 되는 행동을 관장하는 반사 연쇄의 작동성을 약하게 하는 것이다. 실제와 비슷하게 마련된 환경에서 동작 흉내내기를 하면 식은 땀을 흘리는 등 환자는 매우 흥분한다. 하루 20회, 누적 200회를 하면서 괴로웠던 체험을 적게 한다. 이러한 유사 행동을 반복하면서 당시를 상기하는 작문을 하면 환자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해 자극에 대한 반응이 서서히 줄어든다.

3단계 상상은 유사 단계와 마찬가지로 반사를 자극하여 재현시키고, 반사의 작동성을 저하시킨다. 환자에게 눈을 감고 문제 행동 당시 시간별로 자신의 동작, 주위 광경, 다른 사람과의 관계 등을 상세하게 떠올리게 한다. 상상 단계도 하루 수십차례 반복하면 환자는 과거 문제 행동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진다.

대동병원 박상운 병원장
대동병원 박상운 병원장

4단계 유지의 목적은 앞의 단계까지 성립된 제어 자극과 작동성이 줄어든 행동을 관장하는 반사 연쇄를 유지하고 안정화시키는 데 있다. 환자는 3개월 1~3단계 과정을 마치고 퇴원 후에도 1, 2주에 한번씩 외래 방문을 통해 유지 단계를 점검 받는다.

박 병원장은 "강박증의 경우 1단계 키워드 액션만 해도 많이 호전된다. 일본에선 조건반사제어법을 통한 알코올 및 마약 중독 치료율이 50~60%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다"면서 "중독으로 사회 문제를 일으킨 환자나 가족들이 치료의 한계에서 무력감을 느꼈는데, 과학적 이론에 근거를 둔 새로운 중독 치료기법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도움말 대동병원 박상운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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