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그 겨울의 시집

입력 2018-12-26 10:28:30

사평역에서/곽재구/ 창작과 비평사

이 시집, 빈 속지에는 '1994년 1월 22일, 24일에 눈이 내렸다. 대구에 태어나 살아오면서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세상은 화려하고 눈부신 것들로 가득 메워져 있는데 이 시집에는 먼지 낀 간이역과 삶에 지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듯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1983년 5월 초판 발행한 이 책을 만난 것은 출간된 지 10년이 훌쩍 넘은 1994년이었습니다. 발간된 지 10년이 지난 그때도 시인이 노래하던 시 속의 팍팍한 사람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었나 봅니다. 시집을 처음 만난 후 24년이 지나 다시 시집을 펴보니 지난 20여 년 동안의 사회 변화와 개인사가 파노라마처럼 스칩니다. 다섯 명의 대통령이 바뀌었고, 사회는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사회 경제적 분위기를 이끌어 가고 있고, 저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취업이라는 어렵고도 큰 무게를 짊어지고 고된 삶을 살아가고, 죽음의 위험 최전선에 서 있는 하청 노동자들,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힘든 여성들, 인종차별과 불평등에 여전히 내몰린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주민, 난민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평역에서'를 읽은 후 해마다 겨울이면 이 시 속의 풍경이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 중략-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 중략-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남지민 작
남지민 작 '겨울 제주 들판'

시집 '사평역에서'는 사회의 부조리, 폭력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인간의 순수함과 사랑으로 쓰다듬으며 때로는 침묵의 무게가 더 큰 저항으로 느껴지는 시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정권이, 사회가 변했어도 언제 서민이 살기 좋았던 시절이 있었나 싶습니다. 춥고 외롭고 시린 겨울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면서 시인이 돌아보았던 농민, 도시의 소외된 이웃들 그리고 도시 팍팍한 삶 속에 우두커니 선 '나'를 발견합니다. 세상을 잘 몰랐던 그때,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는 그냥 눈으로만 읽었습니다. 20여 년 세상을 더 살고나니 시 속에 담긴 울분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마음 깊이 새기게 됩니다.

곽재구 시인은 1954년 전남 광주 출생으로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했습니다. 1981년 시 '사평역에서'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고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를 써왔습니다. 초기 그의 시 세계는 현실의 거대한 폭력에 대한 분노와 그 아래서 고통 받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고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비루한 그들의 삶에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서정은 현실을 무시하고 내 마음의 마냥 아름답기만 한 말의 나열이 아님을, 분노와 폭력, 항거의 감정까지 부드러운 언어의 물결로 잠재우기도 하고 때로는 바위에 부딪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것임을 곽재구 시인의 시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오늘, 누렇게 바랜 그 겨울의 시집 '사평역에서'를 펴고 난로 속에 톱밥을 던지듯 삶을 지피기 위해 눈물 한 줌 훔쳐 넣고, 좀처럼 오지 않는 삶의 희망 열차를 다시 기다려 봅니다.

남지민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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