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6·10만세운동 이끈 안동 이선호

입력 2018-11-25 14:47:36 수정 2018-11-25 14:57:59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안동의 권오설(1899∼1930)이 체포되면서 만세운동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서 학생들을 이끌며 권오설의 역할을 대신한 안동 이선호. 매일신문DB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안동의 권오설(1899∼1930)이 체포되면서 만세운동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서 학생들을 이끌며 권오설의 역할을 대신한 안동 이선호. 매일신문DB

최근 학계에서 6·10만세운동의 과정과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그 가치가 다시 한 번 인정받게 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재조명됐는데 그가 바로 안동 출신 이선호(1904~?)이다.

안동 예안면 부포리 출신인 그는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동향의 권오설(1899∼1930)이 체포되면서 만세운동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서 학생들을 이끌며 권오설의 역할을 대신했다.

서울 중앙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6·10만세기념비의 모습. 중앙고의 전신인 중앙고보생 이선호(안동)의 선창으로 수십명의 학생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국가보훈처 제공
서울 중앙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6·10만세기념비의 모습. 중앙고의 전신인 중앙고보생 이선호(안동)의 선창으로 수십명의 학생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국가보훈처 제공

이선호의 둘째 아들이며 유일한 후손인 이원정(84) 씨는 "중앙중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때 식구들과 헤어져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며 "전쟁이 끝나고 살던 서울 신당동 집을 다시 찾았는데 집 마저 사라졌다"고 했다.

6·10만세운동으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이선호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이후 그는 서울에서 가정을 꾸렸고 1934년 큰아들 이원성과 1935년 이원정, 1941년 이영수를 낳았다.

하지만 만세운동 주동자였기에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제의 감시와 억압은 계속됐고, 식구는 극심한 생활고까지 겪었다. 광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자식 중 가장 영특한 둘째 원정을 아버지가 있는 고향 안동으로 먼저 내려보냈는데, 나머지 식구둘은 변란을 거치며 지금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선호에 대한 평전은 올 초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관장의 저서 '6·10만세 첫 외침 이선호'가 발간되면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원정 씨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독립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광복 이후 안동에 내려갔을 때 할아버지께서 보관해 온 신문기사를 보고 아버지가 한 일을 알게 됐다"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본인 때문에 혹여나 자식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게 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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