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정신 대구경북의 '얼'-고통스러웠던 만주 생활

입력 2018-11-04 14:27:35 수정 2018-11-04 17:08:16

신흥무관학교는 외부의 감시를 피하고자 백두산 백서농장에서 농사일을 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제공
신흥무관학교는 외부의 감시를 피하고자 백두산 백서농장에서 농사일을 하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제공

1910년대 만주에 터를 잡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혹한의 추위는 물론 식량을 마련하는 것도 고통의 연속이었다.

독립운동가 가족들은 망명하자마자 벼농사를 처음으로 시도했다가 차디찬 수온에 적응하지 못해 참혹한 흉년을 겪었다.

이후로는 찬 물에 적응하는 농법을 개발하기도 하지만, 메밀 농사에 힘을 기울였다. 게다가 석유와 소금이 귀해서 밤에는 전나무 뿌리를 캐서 불을 붙여 등잔불로 대신했고 옥수수 한 짐을 소금 한 줌으로 맞바꿀 정도였다.

특히 양반 가문을 지키며 살던 안동인들로서는 평생 겪지도 못한 고난의 삶을 살게 됐다. 의·식·주 모든 면에서 처참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의기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들이 각오하고 견뎌내던 '3대 각오' 이야기도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즉 굶어 죽는 아사, 맞아 죽는 타사, 그리고 얼어 죽는 동사를 각오하지 않고는 독립운동전선에 뛰어들 수 없었던 것이다.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그들만 독자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웠다. 사실 이들에 대한 인적·물적 바탕인 동포사회의 존재와 역할은 이들의 생존과 활동에 필수조건이었다.

먹고 살아가는 기본부터 인력과 재력, 무기와 탄약 등 모든 자원의 공급지가 바로 동포사회였다.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도 이러한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에 동포사회 형성을 가장 우선 목표로 두었다. 때문에 일제는 독립운동의 뿌리를 자르려고 '훈춘사건'(일본군이 마적토벌을 구실삼아 훈춘의 조선인과 독립운동가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을 날조해 동포사회를 압박했던 것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