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발소를 지킬 것이라고 말하는 현대이발관 주인 박용덕 씨. 박노익 선임기자
오래된 가게 노포(老鋪), 시간이 멈춘 듯 '오랜 된 것'과 '꾸준함'의 미학을 지니고 있는 가게다. 한 자리에서 변함 없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노포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와 기억을 이고 지고 있다. 그래서 오래된 가게를 고포(古鋪)라 하지 않고, 사람처럼 늙은 가게 노포(老鋪)라고 한다. 모두가 다 사라질 세상에서 그래도 없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대구경북 노포를 격주로 소개한다.
◆세월을 품고 있는 이발 기구
슬레이트 지붕 아래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발관은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되돌아간 듯하다. 이발관 바깥 오른쪽에 달려 있는 빨강, 파랑, 하얀의 삼색 등은 전기 공급이 안돼서인지 움직임을 멈췄다. 이발관 입구에 놓여 있는 나무의자는 손님을 한없이 기다린다.
구멍이 숭숭 뚫린 분홍색 커튼 안 이발관에는 사람이 없다. 그냥 침묵만 흐르고 있다. 60년을 훌쩍 넘긴 네댓 평 남짓 될만한 낡은 이발관 내부는 골동품 가게를 연상케 하지만 골동품 가게에서는 찾을 수 없는 훈훈한 정이 선반 가득 쌓여 있다. 큼직한 거울 위쪽에는 색이 바랜 이용소 면허와 이발 자격증, 요금표가 이방인 방문에 긴장한 듯 내려다보고 있다. 옆으로 시골이발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돼지 가족 그림과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이 걸려 있다. 그 옆벽에는 시간에 맞춰 종을 울리는 오래된 괘종시계가 매달려 있다. 그 아래 들어주는 이 없어도 찌륵찌륵 소리를 내며 울려대는 라디오가 높여 있다.
선반 위에 놓인 금고는 페인트칠이 벗겨져 군데군데 녹이 슬었다. 비록 낡았지만 주인의 손에 잘 길들여진 가위와 빗, 솔은 통에 거꾸로 박혀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 가위에는 머리카락이 묻어 있고 빗은 중간중간 이가 빠졌다. 면도할 때 필요한 거품을 내는 거품기에도 때가 잔뜩 묻어 있다. 헤어드라이기는 금고 위에 옆으로 누워 있고, 면도용으로 보이는 신문지는 손바닥 크기만큼 잘려 차곡차곡 쌓여 있다. 모두 주인의 손이 닿기 적당한 장소에 놓여 있다.
벽 한 켠에는 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어 있는 콘크리트로 만든 물통이 있고, 그 옆 세면대 위에는 분홍 세수대야, 플라스틱 물조리개, 비누통이 놓여 있다. 그위에 낡은 13인치 TV가 덩그러니 얹어 있다.
이발관에는 의자 2개 있다. 면도할 때 뒤로 젖일 수 있는 의자다. 하얀 시트가 등받이와 팔걸이까지 덮었다. 요금표에는 조발, 면도, 세면, 드라이를 포함 10,000원이라고 적혀 있다. 가격이 오를 때마다 달력에서 필요한 숫자를 찾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모두 옛날 그대로다

박용덕 씨의 손때 묻은 이발도구.
◆60여 년 가위질
1957년 문을 연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이발관(경북 문경시 동로면 여우목로)의 모습이다.
한참 만에 이발관 주인 박용덕(79)씨가 나타났다. 손님이 없어 주변 밭에서 오미자를 수확하고 있었다고 했다. 머리가 벗겨진 채 빙그레 웃는 모습이 시골 할아버지 같다. 현대이발관은 1957년부터 무려 60여 년간 이발을 천직으로 살아온 그의 삶의 터다.
박 대표는 기자를 보자마자 설명을 이어 나갔다. "손님이 없어요. 이럴 땐 밭에서 농사일도 하다가 손님이 호출하면 온다. 모두 마을 사람이라 훔쳐갈 사람도 없고 사실 훔쳐갈 물건도 없다"며 껄껄 웃었다.
이발 기기는 대부분 오래된 것이라고 했다. "괘종시계는 이발관 지을 때 옆 시계점에서 구입한 것인데 태엽만 감아주면 아직도 멀쩡하게 잘 돌아간다"고 했다. 녹슨 금고 역시 개업 때 산 것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전기 이발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톱 가위와 막 가위 두개면 다 자를 수 있다. 톱 가위는 흔히 숱 가위라고도 하는데, 가위 칼날 부분이 톱처럼 생겼고 그 간격이 넓다. 막 가위는 일반 가위다. 옛날에는 직접 가위를 갈아 썼다"고 했다.
박 대표는 이발 요금을 최근 1만원으로 올렸다고 했다. "1960년대는 이발요금이 쌀 한 되값인 20~30원, 1970년대는 200~300원 했다"며 "한창 때는 농협 직원만큼 돈벌이가 괜찮았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해 이발 기술 배워
박 대표가 열 살 되는 때 6·25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1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단 둘이 남았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당시 나이 열다섯 살. 먹고 살아야 했다. '면소재지에서 이발관 보조원으로 일하며 기술을 익혔다. '생계를 위해서는 기술이 최고'라고 판단했다.
서울에서 잠시 일하다 군에 입대해 3년 동안 이발병으로 근무했다. 서울서 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이발관에 취직했다. 당시에는 머리를 손볼 수 있는 곳이 이발관뿐이어서 손님도 많았다. 특히 서울서 배웠고 손님 스타일에 맞게 잘 다듬는다는 소문이 나 손님이 줄을 섰다. "명절이나 장날 손님이 많을 때는 새벽 5시부터 다음 날 새벾까지 쉬지 않고 가위질을 했다"고 했다. 이발관이 좁아 손님이 밖에서 대기해야 했는데 많을 때는 100명이 넘게 대기할 때도 있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월급이 30만원쯤 됐는데 집을 살 돈이었다"고 했다.
손님이 몰리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이발을 했다. 샘이 난 사람이 '무허가로 영업한다'며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이 들이막쳐 이발 기기를 모조리 압수해 갔다. 먹고 살려고 했는데 너무 한다 싶었다.
당장 이용 면허시험에 응시에 한번만에 합격했다. 1972년이었다. 박

1957년 문을 연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이발관의 모습. 박노익 기자 noik@msnet.co.kr
대표는 맨 중앙에 걸린 이용사 면허증을 가리키며 "당시에는 날아갈 것 같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면허증을 딴 이후 차린 이발관이 현재의 이발관이다. 바쁠 때는 식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잘 됐다. "머리 잘 깎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가족단위로 손님들이 줄을 섰다"고 했다.
◆건강 허락하는
하지만, 세월의 변화는 비켜 가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서자 이발소에 손님들의 발길이 점차 뜸해지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미용실 등 전문헤어숍 등에 밀려 이발소는 점차 사양산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씨는 여전히 이발을 천직으로 살아가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박대표를 찾는 손님은 주문도 짧다. 변함없이 '그대로'를 외친다. 모두 아는 사람으로 별주문 없이 자리에 앉으면 박 대표는 기억을 살려 이발을 해주기 때문이다.
요즘은 오미자 작업을 하면서 전화가 오면 가서 이발을 해준다. "60여 년을 해오던 것이라 별 힘들지는 않다. 문 닫을 수도 없고...."
박 대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100살까지는 이발소를 지킬 것"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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