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 스토리] 오페라 '돈 카를로' 주연 베이스 연광철

입력 2018-09-19 14:01:26 수정 2018-09-20 19:20:15

독일에서
독일에서 '캄머쟁어'(궁정가수) 칭호를 받은 성악가 연광철이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작품과 그의 음악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돈 카를로' 취소표 없나요?" "대기줄에서 차례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이하 DIOF) 개막작(14, 16일 공연) '돈 카를로'가 사상 최초로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이 흥행에 뚜렷한 존재감을 확인 시켜준 음악가가 있다. 바로 베이스 연광철이다. 그가 DIOF '돈 카를로'에 캐스팅이 확정되면서 인터넷에선 당일 주요 자리들이 대거 팔려나갔다. 지역 음악인, 시민들과 스킨십을 위해 마련한 '연광철과 함께하는 마스터 클래스'에는 전국에서 유명 성악가, 교수들이 몰려 정작 시민들은 접근조차 힘들었다.

그의 유명세엔 '공고(工高), 지방대 출신 서울대 교수' 같은 '반전' 행보가 한몫을 한다. 10년에 하나 나올까말까 한다는 독일 '궁정가수' 타이틀 또한 그의 멋진 후광 중 하나다.

'존엄한' 궁정가수이니 당연히 직함에 걸맞은 위엄과 무게가 있으려니 했는데 인터뷰 중 정작 몸가짐은 그의 중후한 저음 보다 낮았다. 인터뷰 라기 보다는 잘 정제된 한편의 인문학 강의를 듣는 느낌이었다.

◆공고, 지방대 출신 핸디캡 딛고 유럽 무대로=아무도 연광철 씨 현재 모습에서 우울, 불행 같은 수식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러나 유명대 교수, 궁정가수라는 타이틀 뒤에는 짙은 우수가 숨겨져 있었다. 그의 고향은 충북 충주. 어린시절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마을에서 자연을 벗삼아 뛰어 놀던 소년 이었다. 빨리 돈을 벌겠다는 욕심에 충주공고에 진학했다. 용접, 토목을 하던 까까머리 소년에게 어느 날 성악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속성으로 성악을 배워 청주대 음대에 입학했다.

공고, 지방대 출신이었지만 그의 꿈은 서울을 너머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졸업 후 '성악의 본고장에서는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지 알아나 보자'며 단돈 700불을 들고 불가리아 소피아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171cm 단신 동양인에게 유럽은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낯선 이방인에게 드디어 빚장이 젖혀진건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

첫 무대에서 그는 입상 문턱에서 아쉽게 탈락(3명 선발 중 4위)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계속 다듬어갔다. 이때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던졌다. 입상자 중 하나가 사고가 생겼고, 다시 한 번 경합기회가 주어졌다. 컨테스트를 거쳐 마침내 그는 유럽무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이 기간이 4개월 쯤 됩니다. 낙심해서 방황만 하고 있었다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었겠죠. 이 무대에서 입상후 유럽무대에서 조금씩 명성을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독일 음악평론의 황제로 불리는 요아힘 카이저는 '바그너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콩쿠르 때 그를 눈여겨 보았던 플라시도 도밍고와 유태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그를 대형 무대로 추천했다. 그 사이 그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악인 50인'반열에 올라있었다.

◆2018년 독일 베를린서 '궁정가수' 칭호=1년에 수천명의 음악가들이 명멸을 거듭하는 유럽무대에서 그는 큰 실패없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일찌감치 현지 평단의 인정을 받아 스타로 발돋움한 배경도 있겠지만 유럽에서 그만의 원칙을 지키며 몸가짐에도 신중했다.

"저는 한번도 유럽인들을 넘어서겠다, 어느 랭킹까지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운적이 없어요. 그냥 제 색깔을 유지하며 제 소리를 더듬어 갔을 뿐입니다. 어느 순간 나의 조각이 그들의 퍼즐에 맞춰졌고 그렇게 그들과 동화해갔던 것이죠."

그의 성공에 대한 보상은 한국에서도 이어졌다. 2009년 서울대에서 그를 교수로 임용한 것. 한국 명문대 교수가 되면서 어릴적 소망을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멈출줄 모르는 그의 '직진'(直進) 본능은 서울대에 사표를 내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작품들이 밀려드는데 도저히 강단과 무대를 같이 지킬 자신이 없었습니다. 찾으려 했다면 중간 어디엔가 타협점이 있었겠지만 소신을 굽힐 수 없었습니다."

2018년 6월 21일은 그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독일 베를린에서 그에게 궁정가수 칭호를 내린 날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어권 성악가에게 주어지는 최고 명예라는 '캄머쟁어'가 된 것이다. 그의 등에 명예로운 휘장이 걸리던 날 플라시도 도밍고는 축하송을 불렀고 그의 지음(知音) 다니엘 바렌보임은 직접 포디움에 올라 지휘를 했다.

◆대구오페라 발전 위해 쓴소리도=올해 DIOF와의 소중한 인연(캐스팅)도 그의 두터운 유럽 인맥에서 비롯되었다. "독일 극장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같이 공연했던 독일 친구가 있어요. 이번에 대구무대에 캐스팅 되면서 그 친구를 잠시 만나러 왔다가 대구 관계자들에게 현장에서 '포섭'되고 말았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번에 작품 기간동안 대구에 머무르며 느낀 여러 소감을 털어 놓았다. 특히 대구시립예술단의 협업 체계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잊지 않았다. DIOF 같은 국제행사에 시립예술단의 제휴나 협업시스템이 없어 인력 운용에 큰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 시립합창단, 무용단, 시향 등 시립예술단들이 국제행사에 긴밀히 연계한다면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이 기대된다는 것.

인터뷰 내내 그의 톤은 낮고 인상도 맑았다. 질문자의 영역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까지 그는 세밀히 들여다 보며 풍부하고 자상한 설명을 이어갔다. 듣기에 그는 공연일 가장 먼저 와서 목을 풀고 늦게까지 남아 후배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유럽과 한국을 망라한 화려한 그의 성공 뒤엔 낮고 중후한 그의 인품이 '베이스'로 깔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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