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마혜선 ‘밤의 여왕 아리아’로 ‘대구의 조수미’로
안동대 음대 최초 재학 중 음악회, 해외무대에서 10회의 입상과 화려한 캐스팅, 유럽 콩쿠르무대에서 쏟아졌던 언론의 찬사들···. 30대 마혜선은 유럽에서 꽤 잘나가던 소프라노였다.
2007년 귀국 비행기에서 마혜선 씨는 큰 꿈에 부풀었다. 유럽 무대에서 쌓은 실력과 화려한 이력을 바탕으로, 국내무대 평단의 찬사가 서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수성아트피아에서 귀국독창회를 열며 신고식을 치렀지만 거짓말처럼 지역무대는 냉담했다. 몇 년간 변변한 캐스팅 제의 한번 없었다. 대학 출강과 생계형 레슨으로 4년을 연명했다.
2011년 뜻밖의 자리에서 '지음'(知音)을 만났다. 원로 소프라노 신미경 대구성악가협회장 이었다. 음악회를 기획하는 자리서 이런저런 주문을 하던 신 씨가 "혹시 '마슬피리' '밤의여왕 아리아'를 불러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극단의 고음에 화려한 테크닉이 필요해 한국에서는 조수미를 비롯한 몇 명밖에 소화가 안된다는 곡이었다. 노래가 끝날 무렵 신 회장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마 씨가 무명의 설움을 딛고 대구 소프라노의 주역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대학 재학 때 독창회 '안동 조수미' 극찬=일찍부터 마혜선 씨 가계엔 예술 DNA가 흐르고 있었다. 마 씨가 음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아버지가 펄쩍 뛰었다. 보수적인 안동에서 음악(音樂)은 '음악'(音惡)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안동대 음대에 입학했고 거기서 자신을 성악가의 길로 안내해준 김영철 교수를 만났다. 그녀의 재목을 알아본 김 교수는 2학년부터 유럽무대로 끌고 다니며 견문을 넓혀 주었다. 3학년 말 유럽연수를 마친 후 그녀는 소프라노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4학년이 되자 김 교수는 독창회를 준비시켰다. 재학생이 독창회를 연건 안동에서 최초였다.
안동시민회관 메인홀을 빌리면서 무모하리만큼 시작한 음악회는 만석을 기록하며 '안동의 조수미' 등장을 알렸다. 그 때 그녀가 입고 무대에 오른 드레스는 그토록 음악을 반대하던 아빠가 지어준 옷이었다. 이듬해 아빠는 지병으로 타계하시면서 이 옷은 유품이 되었다.
졸업 무렵 그녀는 진로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다. 음악교사와 유학 사이에서 갈등이었다. 김 교수가 서울에서 음악회 일정을 잡아왔는데 그날은 마침 교원임용고시 시험을 치는 날이었다. 서울행 기차에 오르면서 교단의 꿈과 결별했다. 졸업 후 바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마그다 올리베로가 극찬한 목소리=유럽무대에 서면서 제일 놀란 건 한국 유학생들의 실력. 현지에선 콩쿠르마다 한국유학생들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1년 반 쯤 지난 즈음 베니스국제콩쿠르가 열렸다. 대회의 명성 못지않게 마 씨를 자극한 건 심사위원장 페도라 바르비에리. 유럽무대에서 그녀의 명성은 레전드급이다. 단지 그녀 앞에서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콩쿠르에 나갔다. 첫 출전에서 3위를 기록했다는 기쁨보다 거장 앞에 섰던 1시간이 더 값진 일이었다.
2003년 그녀를 유럽무대 화려하게 데뷔시킨 '마그다 올리베로콩쿠르'가 열렸다. 심사위원장 마그다 올리베로 역시 유럽 전설의 소프라노였다. 그녀는 콩쿠르 기간 내내 마혜선을 주목했다. 거장의 기대에 그녀는 당당히 대상으로 보답했다.
"소리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마혜선처럼 귀한 보석을 찾아낸 것은 큰 행운이다."
시상대에서 올리베로가 메달을 걸어주며 남긴 말은 지금도 유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로시니국립음악원 졸업 당시 그녀의 성적표는 '넘사벽'으로 남아 있다. '10점 만점에 로데'였다. 점수를 더 주고 싶어도 더 이상 줄 점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로시니음악원 졸업 이후 그녀는 몇 차례 오디션을 거쳐 2003년 유럽 성인무대에 데뷔했다. 4년 간 바삐 이탈리아 무대를 뛰어다녔지만 생활고와 문화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 귀국길에 올랐다.
◆우연한 기회에 대구음악계 스타로='마그다 올리베로가 극찬했다'는 목소리로 잠시 주목을 받았던 귀국음악회는 그걸로 끝이었다. 보수적인 지역 문화예술 구조, 배타적 풍토는 그녀를 주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2011년 작은 음악회를 기획하던 소프라노 신미경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몇 곡을 듣던 신 회장이 갑자기 물었다. '마술피리'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불러볼 수 있느냐고. 유럽에서 이미 레퍼토리로 다져 놓았기 때문에 자신은 있었다. '콜로라투라'의 초절정 창법과 격분으로 가득찬 선율이 한영홀 작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이 단한번의 오디션으로 마 씨는 그 갈라콘서트 무대에 올랐다. 평단의 극찬이 이어지면서 여러무대가 한꺼번에 열렸다.
"정말 4년 만에 기적이 찾아온 거죠. 조용히 시들어가던 제가 벌떡 일어나 지역 음악계의 주류로 단숨에 뛰어올랐던거죠." 이렇게 이어진 무대는 '마술피리' '사랑의 묘약' 과 '능소화 하늘꽃'까지 이어졌다.
지난 달 16일 고향 안동에서 그녀의 '능소화 하늘꽃'을 공연이 열렸다. 고향의 우물가, 고샅길을 떠올리며 맘껏 '여늬'를 연기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능소화 하늘꽃'은 한국 무대를 넘어 유럽 무대에 본격 진출을 앞두고 있다.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제 인생 굽이굽이 마다 좋은 인연들이 있었어요. 저를 음악가의 길로 안내해주신 김영철 교수님, 초야에 묻혀 있는 저를 발굴해 대구무대 주역으로 세워주신 신미경 교수님, 그리고 나의 소울(Soul)작 '능소화 하늘꽃'과의 만남까지. 앞으로 제 앞길에 또 어떤 인연이 나타나 저를 이끌어 주실지···.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