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안 가득 초록 에너지를 담다, 담양

입력 2018-07-27 05:00:00

높다란 대나무들이 서로 팔을 껴안고 만들어낸 짙은 그늘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는 담양 죽녹원은 여름철 최고의 피서지로 손꼽힌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높다란 대나무들이 서로 팔을 껴안고 만들어낸 짙은 그늘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는 담양 죽녹원은 여름철 최고의 피서지로 손꼽힌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나무처럼 살고 싶었다. 대쪽같은 절개까진 아니더라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올곧게 살고 싶었다. 대나무처럼 살고 싶었다. 한여름 폭염에도, 찬서리 가득한 겨울에도 늘 한결같은 푸르름을 자랑하는 대나무 잎처럼 세파에 찌들어도 늘 마음만은 싱그러움으로 가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그리 녹록치 않다. 올해도 잘 살아보자 다짐하고 열심히 달려왔건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보니 그 마음 어디론가 간데 없고 시간은 훌쩍 흘러 벌써 7월 하순을 지나고 있다. 연일 쉬지 않고 대지를 가마솥 마냥 달궈대는 폭염마저 마음을 지치게 한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치고 망신창이다.

그래서 한해의 절반을 넘어선 시점에는 '휴가'가 필요하다. 여름 휴가는 잠시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금 에너지를 채워갈 오아시스와도 같은 시간이다. 올 여름 , 대나무숲을 비롯해 메콰세콰이어길, 관방제림 등 푸르른 나무 그늘에서 에어컨 바람이 아닌 자연풍에 몸을 식힐 수 있는 전라남도 담양으로 가 보자. 고요한 푸르름으로 가득한 슬로시티 담양에서 마음에 큰 쉼표 하나 찍으면 또 다시 남은 한해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응어리 뱉어내는 대나무 숲길

대나무를 엮어 만든 흔들그네에 몸을 누이고, 산들산들 이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한여름 따가운 햇살도 대숲이 만들어내는 짙은 그들을 뚫지는 못한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대나무를 엮어 만든 흔들그네에 몸을 누이고, 산들산들 이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한여름 따가운 햇살도 대숲이 만들어내는 짙은 그들을 뚫지는 못한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마음속에 뱉어내고 싶은 말이 가득하다면 맨 먼저 대숲으로 달려가보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외쳤던 그 대나무숲처럼 내 모든 속 이야기를 듣고도 모른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 같다. 대숲길 사이로 부는 바람에 댓잎들이 흔들리며 빚어내는 차르르륵 소리는 지쳐 있는 심신에 청량감을 불어 넣어준다.

담양은 본디 '대나무의 고장'(竹鄕)이다. 담양 354개 마을 중에서 무려 350개 마을에 대숲이 있다고 하는데, 그 면적을 다 합치면 16.5㎦로 축구장 1800개에 달하는 넓이다. 연평균 섭씨 10도, 연간 강우량 1000㎜ 이상에 완만한 경사 지형을 갖춘 대나무 생장에 최적지인 덕분이다.

담양의 수많은 대밭 중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죽녹원은 2003년 담양군이 성인산 일대에 조성한 약 16만㎡의 울창한 대숲이다. 키높은 대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어 꽤 오래된 고즈넉한 느낌을 주지만 의외로 조성된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온 나라가 열섬에 갇혀 바글바글 끓고 있는 7월 하순의 어느날, 죽녹원 입구 돌계단을 밟고 대숲길로 들어섰다. 높다란 대나무들이 서로 팔을 껴안고 만들어낸 짙은 그늘이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는 것만으로도 벌써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대숲에서 서늘함을 느끼는 것은 산소 발생량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담양군에 따르면 대나무숲은 외부 온도보다 4~7℃정도 낮고 산소발생량이 많으며 음이온 발생량이 1200~1700개로 일반 숲보다 10배나 많다.

비슷비슷한 굵기의 대나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빛깔은 다 제각각이다. 나이 어린 나무는 보다 옅은 초록빛, 오래된 나무는 담갈색에 가까운 짙은 빛깔을 띈다. 모든 어린 것들은 싱그러운 모양이다. 고개를 힘껏 젖혀 대나무 꼭대기를 바라보면 햇빛에 반사된 댓잎들이 에메랄드빛 보석마양 투명하게 반짝인다.

뜨거운 여름엔 잠시 살갗을 스쳐 지나는 한줄기 바람에도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대숲 그늘이 짙다고 해도 무더위를 완전히 식혀주긴 역부족. 이때는 죽녹원 내에 있는 이이남아트센터에서 잠시 몸을 차갑게 식힌 뒤 다시 산책을 즐기면 좋다. 이이남미술관 작품을 감상하는 자체만으로도 또 하나의 완벽한 피서다. 별과 달이 빛나는 밤 드리워진 대나무의 그림자를 비롯해, 하얀 눈 소복이 덮어쓴 대나무 등 하나하나의 작품이 뇌와 영혼을 시원한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

◆여름 휴가 최고의 인생샷 얻을 수 있는 메타세콰이아길

죽녹원이 외지인들에게 유명한 관광명소라면, 관방제림은 단양 지역 주민에게 최고의 여름 휴식처다. 넓은 평상에는 수십명의 주민들이 손에 부채 하나씩을 들고 모여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죽녹원이 외지인들에게 유명한 관광명소라면, 관방제림은 단양 지역 주민에게 최고의 여름 휴식처다. 넓은 평상에는 수십명의 주민들이 손에 부채 하나씩을 들고 모여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내친 김에 몸안 가득 피톤치드를 담아보기로 했다. 담양은 죽녹원 외에도 나무로 가득한 초록도시다. 그래서 담양을 방문할 때는 꼭 걷기에 좋은 편안한 의상과 신발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죽녹원 바로 맞은 편 길을 건너면 영산강 상류인 담양천 물길을 따라 '관방제림'이 조성돼 있다. 담양천을 건널 수 있게 만들어진 예쁜 돌다리를 건너면 보이는 둑이 바로 관방제이며, 그 길을 따라 수령이 200~300년에 달하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두고 '관방제림'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곳의 나무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들이어서 나무마다 이름표를 달고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푸조나무가 대다수다.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선시대 관에서 조성했기에 제방을 따라 줄지어선 나무숲과 함께 관방제림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죽녹원이 외지인들에게 유명한 관광명소라면, 관방제림은 단양 지역 주민에게 최고의 여름 휴식처다. 넓은 평상에는 수십명의 주민들이 손에 부채 하나씩을 들고 모여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다.

담양의 최고의 포토포인트로 꼽히는 메타세쿼이아길. 녹음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 훨씬 시원한 기운이 느껴지는 피서지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담양의 최고의 포토포인트로 꼽히는 메타세쿼이아길. 녹음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 훨씬 시원한 기운이 느껴지는 피서지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담양의 또 다른 최고의 포토포인트로 꼽히는 메타세쿼이아길을 만날 수 있다. 이곳 역시 녹음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 훨씬 시원한 기운이 느껴진다. 살랑살랑 부채 하나 들고,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걸어가면 이것이야 말로 휴가다운 휴가다. 누구하나 잰 발걸음 재촉하는 이 없이 다들 유유자적이다.

담양군청 동쪽 학동교차로에서 금월교에 이르는 총 길이 8.5㎞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원래 국도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새롭게 도로가 놓이면서 이 길은 산책로로 사용되게 됐다. 길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우람한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1970년대 초반 전국적인 가로수 조성사업 때 담양군이 3~4년생 묘목을 심은 것이 세월이 흐르며 지금과 같이 자라 짙은 터널을 형성했다.

◆송강 정철의 문학세계를 엿보다

식영정 옆 아름드리 소나무. 강골함과 넉넉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식영정 옆 아름드리 소나무. 강골함과 넉넉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초록 가득한 산책로만 걷기에 지루하다면 광주호 일대 자리잡은 다양한 누각들을 둘러봐도 좋다. 담양은 예로부터 '담양 갈 놈'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조정에서 많은 신하들을 유배 보낸 곳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담양의 문화는 풍요로워졌다. 한양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물 맑고 볕 좋은 곳에 수많은 정자와 누각을 짓고 살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 중에서도 식영정 일대는 송강 정철 선생의 '성산별곡' 탄생지로 그의 가사문학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의 식영정은 돌계단을 올라가야하는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다. 식영정은 전남 기념물 제1호로 16세기 호남의 문인인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식영정 뒤편에 있는 성산은 무등산의 동편 끝자락으로 정철의 성산별곡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에서 공부하던 동문이다. 현재 환벽당 행정구역 상으로는 광주에 들어있는 식영정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는데, 이것이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식영정 뒤편에는 성산별곡 시비가 놓여있다.

식영정에서 또 하나 눈여겨 봐야할 것은 바로 강골함과 넉넉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아름드리 소나무다. 굵은 기둥이 쭉쭉 뻗어 상부에는 성산별곡 중 '짝맞은 늙은 솔은 조대에 세워 두고'라는 구절을 감안할 때 그 당시에 세워진 소나무가 아닐까 조심스레 유추해 본다.

마치 작은 사각형의 연못 연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누각 부용당.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마치 작은 사각형의 연못 연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누각 부용당.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다시 돌계단을 내려가면 아래쪽으로는 부용당과 연지, 그리고 그 옆으로 서하당과 장서각, 고직사가 눈에 들어온다. 사각형의 작은 연못 연지에는 연꽃이 피어있고, 그 사이로 개구리 한마리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다. 하늘에 유유히 떠가는 흰구름과 어우러져 그림같은 풍경이다. 정철이 이곳 뒷산인 '성산'에서 수많은 한시와 단가를 남긴데는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묵직한 가르침이 큰 몫을 하지 않았나 싶다.

식영정 바로 지척에는 한국가사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및 친필 유묵을 비롯해 가사문학 관련 서화 및 유물 1만 1천461점 등이 전시돼 있다. 산방과 전통찻집도 마련돼 있어 잠시 한낮의 더위를 피해가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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