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도 창의군 대장 왕산 허위-왕산 문중의 항일독립운동(9)

입력 2018-07-19 14:34:23 수정 2018-07-20 13:48:24

구미시 임은동 왕산기념관 옆에 한말 의병장 허위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전병용 기자
구미시 임은동 왕산기념관 옆에 한말 의병장 허위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전병용 기자

의병대장 허위 선생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왕산 허위는 친필로 글을 남겼다. 유묵엔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는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고 씌어 있었다. 비록 자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조국의 처지가 이러하매 너희 형제들은 내 뜻을 따라 조국독립 투쟁에 매진하라는 당부였다.

그의 당부대로 허위의 형제와 자손들은 한결같이 독립투사의 길을 걸었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방산 허훈과 성산 허겸·범산(凡山) 허형·시산(是山) 허필(許苾) 등은 그 일가를 이끌고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해 국권회복을 위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허위가 순국한 뒤 숙형 허겸을 비롯한 일가들은 만주로 망명했고, 그의 의병 동지 양제안 등과 문인 박상진 등은 국내·외를 통해 조국 광복에 헌신했다. 허겸과 종반 간인 허형, 허필은 북만주로 이역(異域)의 하늘 아래 뼈를 묻었고, 그들의 아들들은 만주와 노령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이역 하늘 아래 국제 미아(迷兒)로 살고 있다. 왕산 4형제와 4촌 형제뿐 아니라 후손도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순국한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민족의 혼 그릇이란 추모비에는 애국지사 165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전병용 기자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순국한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민족의 혼 그릇이란 추모비에는 애국지사 165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전병용 기자

◆방산 허훈

방산(舫山) 허훈(許薰·1836∼1907)은 진보의진의 창의장이었다. 1896년 4월 진보의진이 창의됐다. 창의장은 허훈이고, 부장은 신상익이었다. 진보의진은 규모나 전투력이 매우 열악했다. 그래서 영양·청송의진과 합세해 의성·안동의진을 배후에서 도왔다. 을미의병 이후 허훈은 진보 흥구에 칩거를 하던 중 1905년 전답 3천여 두락(통상 마지기)을 팔아 군자금으로 허위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또 1907년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에 추대됐지만, 그해 8월 서거했다.

◆성산 허겸

성산(性山) 허겸(1851∼1940)은 1896년 허위의 김산의진과 허훈의 진보의진에서 의병활동을 펼쳤다. 1905년 을사조약 반대운동과 1907년 의병투쟁, 1912년 부민단 단장을 지내는 등 국내·외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허겸은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1905년 10월 21일 이완용·이근택 등 을사오적 암살사건에 가담했다가 투옥됐다. 1907년 허위가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하자, 그 막하(幕下)에 참여했다. 경기도 연천(漣川)과 삭령(朔寧) 등지에서 부하 400여 명을 이끌고 항쟁을 했다.

허겸은 종손 허종과 함께 1907년 4월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12년 허위의 유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해 김동삼(金東三), 유인식(柳寅植) 등과 함께 만주 통화현(通化縣)에서 중어학원(中語學院)을 개설해 한중 양국 사람들의 친선과 한인의 재만 활동을 용이하도록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 허겸은 합니하(哈泥河)에서 경학사(耕學社)를 계승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해 초대 단장에 취임했다. 부민단은 남만주에 이주한 한인 개척 농민의 자치기관으로 민생·교육·군사 등의 구국운동을 전개한 단체이다.

허겸은 부민단을 이끌며 10여 년 동안 남북만주와 노령, 그리고 국내에 잠입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했다. 허겸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회원으로 박상진(朴尙鎭)과 이관구(李觀求)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더구나 71세의 고령으로 3·1독립운동 이후인 1922년 부하 30여 명과 함께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동대문경찰서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86세에 만주로 망명해 광복운동에 헌신하다가 90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박경 허학

박경(博卿) 허학(許學·1887∼1940)은 허위의 4남2녀 가운데 장남이다. 부친인 허위가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할 당시 21살의 약관으로 참여했다. 각처에 산재한 의병장들에 대한 연락과 무기 조달을 위해 각처로 잠복해 활동했다.

1913년 9월 임병찬(林炳瓚), 이인순(李寅淳), 전용규(田鎔圭) 등과 함께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사건의 주모자로 활동하다가 1914년 5월 동지 54명과 함께 체포됐다. 허학은 1912년 동지 박노창(朴魯昌) 등과 만주로 건너가 강산(崗山) 이도구(二道溝)에서 김동삼(金東三) 등과 같이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설립했다.

1917년에는 유하현(柳河縣) 전수하자(前樹河子)에서 이세기(李世基) 등과 함께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설립해 광복운동에 필요한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중산 허종

중산(重山) 허종(許鍾·1883∼1949)은 허훈의 장자인 래정공 숙의 아들이다. 허종은 종조부 허겸과 같이 신민회의 회원으로 가입해 대구에서 활동을 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도산 안창호가 발기해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열 등 7인의 창건위원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대구는 신민회의 거점도시였으며, 그 조직은 경상북도 지방까지 발전했다. 허종은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지만, 1949년 6월 사망했다. 그의 아들 홍산(鴻山) 허흡(許洽)은 대구시장을 지냈다.

◆범산 허형계열

범산(凡山) 허형(1843∼1922)은 해초공 희의 장자이며, 시산 허필의 형이다. 허위와는 종반 간이다. 허형의 딸 허길은 진성이씨 이가호(李家鎬)에게 출가해 육사 이원록을 낳았다. 이원록은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허형은 을사조약 이후 오적 암살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이후 1915년 가족 및 동생 가족들과 만주로 망명했다. 향년 80세로 1922년 10월 서거했다.

시산(是山) 허필(許苾)은 해초공 희의 둘째아들이다. 허위의 의병항쟁에 적극 가담했다. 1920년 중국 동북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허필은 한학과 한방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 한약방을 열어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는 데 한몫을 했다. 가족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전하다가 1932년에 서거했다.

일창(一蒼) 허발(1872∼1955)은 허형의 둘째 아들이다. 허발은 허위의 의병투쟁에 가담해 중요한 일들을 맡았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남북만주에서 대규모로 확산되자 남만 대표로 국내에 잠입해 활동했다. 1933년 국내에 들어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대구경찰서에 체포됐다.

허발이 경영하던 '일창한약방'은 독립운동의 연락처였으며, 이상룡·김동삼·안중근·안경학 등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허발의 묘는 대구 동구 신암동 선열공원에 있다.

일헌(一軒) 허규(許珪·1884∼1957)는 허형의 셋째 아들이다. 192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사건으로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다. 김규식·김구·안재홍·여운형 등과 자주 만났다. 1928년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지령을 받고 군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을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가 붙잡혀 경성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특히 백범 김구와 통일조국을 위해 노력했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계와는 관계를 끊고 대구로 내려와 문파(汶坡) 최준(崔浚) 등과 아양음사(峨洋吟社)를 창립해 시회(詩會)를 열며 여생을 보냈다.

◆해외로 뿔뿔이 흩어진 자손들

허위의 조카인 허형식을 비롯해 많은 후손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를 내다보고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는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했다.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4남2녀를 동반해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사촌들도 뒤를 따랐다. 이 때문에 후손들이 중국과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북한 등 해외에 뿔뿔이 흩어져 어려운 생활을 했다.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가 제기될 때 허위의 후손들 예가 종종 인용된다. 허위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고, 그가 출생한 구미시 임은동에 왕산허위기념관이 건립되고, 왕산기념공원이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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