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이주향 수원대 교수의 '이야기와 치유의 철학'을 연재합니다. 이주향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나 오래된 이야기가 근거없는 허구가 아니라, 이땅의 기억이며, 우리가 살고자 했던 삶 혹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원형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신화와 삶, 삶과 신화를 넘나들며 인간과 존재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것이기에 삶을 완전히 바꿀까요? 파우스트의 그레트헨은 사랑을 하다 미쳐 죽고, 제주신화의 당금애기는 사랑을 하다 쫓겨납니다. 모두 현재의 평온이 깨지는 경험을 하지요.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안정 속으로 도망가서는 안 되는 법이라는 것을 사랑만큼 절절하게 알려주는 것도 없습니다.
시준님을 만나기 전 당금애기는 꼭 파우스트를 만나기 전 그레트헨입니다. 그녀는 그레트헨처럼 청순합니다. 사랑스런 그녀들은 가족의 자부심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당금애기는 제주의 그레트헨이라고. 아니 그레트헨은 유럽의 당금애기라고. 어쩌면 청순하고 올곧은 비극의 주인공 그레트헨이 그 시절 한반도로 건너와 바다를 건너 제주로 갔다면 그녀는 분명 당금애기로 부활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레트헨보다 당금애기가 보다 성숙한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당금애기는 주인공입니다. 그렇지만, 그레트헨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파우스트의 주인공은 그레트헨이 아니라 파우스트지만, 당금애기의 주인공은 시준님이 아니라 당금애기입니다. 여성의 관점에서 통과하게 되는 고난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당금애기의 매력입니다.

당금애기는 해동 조선의 제일 부자였던 아버지가 아홉 아들을 낳은 후에 기도로 얻은 귀한 외동딸입니다. 귀한 딸이니 만큼 날아갈까 빼앗길까 켜켜이 감춰진 대문 안에 꼭꼭 숨겨두고 키웠습니다. 시준님은 부잣집 열두 대문 안에 갇혀 있는 보물 아기씨와 어찌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까요.
당금애기의 파우스트는 시준님입니다. 시준님이라니요? 이름에서 벌써 세존의 향기가 있지요? 범상치 않습니다. 그는 6년 동안 수행한 후 넓은 세상을 두루 돌다 당금애기를 찾아왔답니다. 6년 동안 수행한 시준님이라니,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을 닮았지요? 그런 그가 아버지 어머니가 여행을 떠나고 아홉 오라비도 나랏일을 위해 집을 떠나있는 틈을 타 누추한 몰골을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운명처럼, 진리처럼.
스님의 모습을 한 시준님은 시주를 받겠다고 열두 대문을 엽니다. 불심 깊은 당금애기, 어떤 쌀로 시주할까, 시준님께 묻습니다. 아버지 드시던 쌀은 누린내가 나서 받을 수 없고, 어머니 쌀은 비린내가 나서 받을 수 없다네요. 오빠들의 쌀은 땀내가 나서 받을 수 없다는 시준님은 당금애기가 먹던 쌀로 서 말 서 되 서 홉을 달라 합니다. 아버지의 딸로서, 어머니의 딸로서, 오빠들의 동생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너 자신으로서 만나겠다는 것, 그러니 바로 너 자신을 보여 달라는 거지요. 당금애기의 홀로서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넓고 넒은 아버지의 울타리가, 깊고 깊은 어머니의 품이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나'자신을 믿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믿음 속에서 형성된 자신감은 누군가를 향해 자유롭게 쌀을 나눕니다. 쌀을 나눈다는 것은 삶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쌀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바로 부모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와 당당히 자기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허락 없이, 어머니의 승낙 없이, 오빠들의 동의 없이 당금애기는 시준님과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거침없는 사랑을 나눈 거지요. 아버지의 법이 '문란'으로 규정할 수도 있는 하룻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밤, 전 생애를 바꿔버린 우연한 밤을 경험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오고 오빠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당금애기는 이미 옛날의 당금애기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몸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점점 배가 불러와 결국은 오라비들에게 들키고 맙니다. 오라비들과 아버지는 가문을 더럽혔다며 당금애기를 죽이려 하는데 어머니가 말립니다. 옳고 그른지는 하늘이 판단할 일이라며 뒷산 바위 돌구멍에 밀어 넣자고 제안한 거지요. 잘 했으면 하늘이 살릴 거고, 잘못 했으면 하늘이 죽일 거라며 하늘에게 판단을 맡기는 건 역시 여성성입니다. 당금애기는 깜깜한 돌구멍 속에서 흙비 맞으며 세 아들을 낳고 돌아옵니다.
나는 이 대목을 좋아합니다. 당금애기 혼자 구멍 속, 동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이 장면! 본질적인 삶의 고통은 나눌 수 없습니다. 혼자 오롯이 겪어야 합니다. 내 몫의 고통을 피해가려 하거나 고통에서 도망가는 자, 새 생명을 낳을 수 없고, 지킬 수 없습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채 돌구멍 속에 갇혀 지낸 당금애기는 동굴 속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쑥과 마늘로 살아온 웅녀를 닮지 않았나요? 동굴의 시간, 돌구멍의 시간은 인간의 참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자기만의 어둠의 시간을 오롯이 겪어낸 당금애기, 세 아들들에게 아버지도 찾아줍니다. 시준님이 남긴 증표를 가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시준님을 찾아가는 거지요. 자기의 힘으로 아이를 낳고, 남편을 찾고, 아버지를 찾아주는 당금애기가 마지막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남편과 함께 아이들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짓는데 남편에게 완전히 맡기지 않고 자기 의견을 보탭니다. 단순히 보태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이름도 없이 살았다며 서러워하는 아들들을 살피며, 시준님은 아이들에게 이름을 줍니다. 첫째는 푸른 띠를 하였으니 청산이라 하자 하는데, 바로 그 때 당금애기가 나섭니다.
"청산은 삼사월이나 청산이지 구시월에도 청산일 겁니까. 맏이로 태어났으나 맏형 자에 부처불 자를 써서 형불이라 부르지요."
시준님이 동의합니다. 이번엔 누른 띠를 띤 둘째아이에 대해 시준님이 '황산'이 어떠냐고 하자 당금애기, 또 나섭니다. "황산은 구시월이나 황산이지 동지섣달도 황산이겠습니까? 둘째로 태어났으니 재불(再佛)이라 하지요."
백산이라 불릴 뻔한 막내도 삼불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부처인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준 후에는 자기 힘으로 당당히 아들 이름을 지어주는 당금애기가 참 멋있었습니다. 좋은 이름은 본성에 가 닿지요? 시준님도 그것을 알아서 푸른 띠, 누른 띠, 흰 띠를 보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당금애기는 단순한 현상의 모습이 아니라 현상 너머 본성을 본 것입니다. 본성을 봐주고 우리 모두 부처임을 본 것입니다. 당금애기와 시준님 사에서 태어난 이 쌍둥이 삼형제가 삼불제석 제석신이고, 그 어머니 당금애기는 아이를 점지하는 삼신입니다.
그녀가 삼신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녀에게서 왔다는 거지요? 당금애기는 예기치 않게 실수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 자책하다 늘 왜소해져 있는 아이들에게 너의 본질은 부처라고, 자연처럼 자연스러워 작아져있을 때조차 작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우리 안의 여신, 푸근한 여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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