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비 냄새가 났던 것도 같습니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비가 오나 보다 했습니다. 아침이 오고 산을 엉금엉금 기어 내려오는 구름과, 젖은 도시를 바라보며 열 살의 장마를 기억합니다.
열 살의 내가 폴짝폴짝 뛰면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 개울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차례로 징검다리를 건너는 동안, 나는 징검다리가 싱거워 물속으로 첨벙첨벙 걸어갔습니다. 송사리를 잡겠다고 안간힘을 쓰면 친구들은 개울 건너에서 나를 기다려주었습니다. 가끔 수양버들 아래서 무언가가 떠내려오곤 했는데, 한 치 앞에 다다라서야 그것이 슬금슬금 물살을 탄다는 걸 알았습니다.
"배… 뱀이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뱀은 어느새 제 갈 길 가고, 남은 건 흠뻑 젖은 나 혼자였습니다. 저벅저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께 야단맞을 일이 한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징검다리를 밟지 않았지요.
어느 아침이었던가요.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어머니는 조신하지 못한 내게 고무신을 신기셨습니다. 빨갛고 노란 꽃이 정신없이 그려진 고무신을요. 아무리 어렸어도 내가 좋아할 리 없잖습니까. 심통이 난 나는 질벅한 마당을 쫓아다니며 발자국을 마구 찍어댔습니다. 아버지가 아시면 경을 칠 일이란 걸 잘 알면서도.
개울은 물이 불어 있었습니다. 학교에 가기 위해 모인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몇 해 전 이 개울에서 아이 하나가 물살에 휩쓸려 죽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모두를
'죽음'이라는 공포로 몰아갔습니다. 중학생 오빠들이 물살을 이겨보려 했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경운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아이들은 경운기에 실려 학교로 향했습니다. 곱절의 거리를 우회해서 다다른 학교.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누군가의 은혜가 차고 넘쳤습니다.
오늘 마흔둘의 장마를 겪습니다. 빨래가 꿉꿉하게 말라가는 건 좀 싫지만 무엇인가가 쑤욱 쑥- 자라는 냄새가 나서 참 좋습니다. 이젠 흠뻑 젖어도 좋을 그런 나이인 것 같습니다. 열 살의 폐가에는 장마가 난 후 풀들이 쑤욱 쑥- 자라 숲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떤 외로움과 곤궁이 밀려오곤 하는데 그 풀숲의 풀들은 그곳으로 나를 불러들여 은둔하게 합니다. 비가 흘러들어간 내면의 구석에선 열 살의 내가 아직도 쑤욱 쑥- 자라고 있죠. 슬레이트 지붕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 그 물소리에 빠진 내 안의 숨소리는 또 얼마나 깊어질까요. 그리하여 내가 웃자라기 시작하는 장마, 나는 아직도 새 날을 꿈꾸는 그 소리가 참 듣기 좋군요.
박시윤 수필가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