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관 (74·대구시 수성구)
그가 말했다. 걸을 수 있을 때 가 보고 싶은 곳을 가보지 못하고,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싶은 걸 먹지도 않았는데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 크게 후회된다고,…… 병원 병상에 누워 토하는 지인의 넋두리가 칠순의 모자를 눌러쓴 나의 가슴에 음각처럼 새겨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나중에 어떤 후회를 하게 될까? 버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겨울밤거리를 내다보며 결심했다. 내 삶의 흔적을 기록해보자고.
며칠 고민 끝에 ‘뒤로의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시련의 연속이었던 내 삶을 알몸으로 보여주기가 부끄러워 망설이자 마음 한구석에서 용기의 용트림이 일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얼굴이 없듯이 똑같은 삶도 없다고, 내가 새긴 나이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존재라고, 무엇보다도 시간이 내 편이 아니라는 가슴의 외침이 컸다.
여행 방법은 나만이 탈 수 있는 기억 열차를 타고 현재를 출발 나만이 드나들 수 있는 어머니 기록관으로 가서 고난의 연속이었던 삶을 찬찬히 되새겨보고, 반환점을 돌아 나의 길은 가정을 이룬 이후부터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기로 했다.
기억 열차는 빨랐다. 어머니 기록관이 가까워지자 먼저 어머니가 걸어온 길이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는 철길처럼 길게 다가왔다. 길은 한눈에도 험했다. 좁고, 가파르고, 바닥에는 울퉁불퉁 돌멩이가 지천이었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어린 사형제를 태운 수레를 끌고 어떻게 저 험한 언덕길을 걸어왔을까?
잠시 숨을 고르고 기록관 안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방은 병원중환자실이었다. 매캐한 소독 냄새가 몸과 마음을 짓뭉갰다. 병상으로 어정어정 걸어가 어머니를 내려다봤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깊은 주름이 한가득 힘겨운 삶을 견디어온 걸 대변해주고 있었다. 눈을 감고 꼬챙이 다리를 주무르자,
“인제 그만 가면 안 좋게나.” 자식의 온기를 느낀 어머니의 신음 넋두리가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이 순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自愧感)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데 어머니는 또 자책이시다.
“잘 가르치지도 잘 먹이지도 못했는데, 고생만 시킨다.” 라고 어머니 침상에 얼굴을 묻는데 얼마 전 병원을 오기 위해 집 비우던 날의 영상이 아리게 돌아갔다.
“불은 다 껐나, 물은 잠그고,” 자동차 문을 닫지 않고 주문 외우시던 어머니는 급기야 차에서 내리셨다.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데다 시도 때도 없이 앙탈을 부리는 두 무릎을 지팡이로 겨우 달래며 부엌으로 간 어머니는 행주와 걸레를 갖고 나와 빨랫줄에 널며 말했다.
“며칠 비우면 곰팡이 핀다고,” 그리곤 언덕 위 밭에 널브러져 있는 땔감인 빈 깻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비 올 것 같으니 창고에 넣으라고.” 그 깻단은 겨우내 눈비를 맞아 반쯤이나 썩은 것이었다. 깻단이 다 옮겨질 즈음 어머니는 또 장독대로 가셨다. 멸치젓 항아리 뚜껑을 열고 검지로 젖 장을 찍어 쩝쩝 입맛을 다시곤 혼잣말을 항아리에 담았다.
“올해 김장은 정말 맛있겠다.”
이런 행동을 낱낱이 내려다보던 집 뒤란 감나무에 터를 잡은 까치 부부가 우듬지에 부리를 닦으며 반복해서 물었다.
“며칠 있다가 오실 거죠?” 까치 물음에 감나무 올려다보는 어머니 눈가에 이른 봄볕 한 점이 반짝거렸다. 오전 내내 씨름 끝에 병원으로 출발한 어머니는 뒷좌석에 꼿꼿이 앉자 거르지 않던 낮잠도 잊으시고 눈 카메라로 스쳐 지나는 산천을 찍고 있었다.
병원에 온 지 보름 만에 담당 의사의 호출을 받았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준비를,…… ” 순간 삼천 볼트의 전류가 머리 위에서 발끝까지 쫙 흘렀다. 한평생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잠 한 번 편히 자지 못하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한 몸 불사른 그 어머니가 지금 이 세상의 공기를 마시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단다. 청천벽력에 칠월 가뭄의 쩍쩍 갈라지는 논처럼 목이 탔다. 모든 것이 보기 싫었다. 푸른 나뭇잎들이 미웠다. 흰 꽃, 붉은 꽃잎들은 볼 성 사나웠다.
온통 세상이 뒤바뀌는 것 같았다. 바뀌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올려다보이는 것도 내려다보이는 그 무엇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가는 자동차 행렬은 여전히 꼬리를 물고 빌딩 사이로 바쁘게 오갔다. 세상은 모두 그대로인데 나만 망망대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난파된 배를 타고 한줄기 불빛을 갈망하는 신세였다. 하염없이 추적거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다 막막함에 눈을 감자 최근 삼 년간의 어머니의 모습이 엉금엉금 걸어오며 나를 후회의 늪으로 잡아끌었다.
미수의 어머니는 거동이 힘겨운 상태에서 경주 산내 산골에서 홀로 기거하고 계셨다. 슬레이트 지붕의 방은 겨울이면 전기장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덮는 이불만 세 개를 보태 겨울을 나던 어머니였다. 한 달에 서너 번 찾아가 한 끼 밥을 같이 먹고 몇 푼의 돈을 마른 풀잎 같은 손에 올려주면 어머니는 머릿속 가계부를 꺼내 읽으셨다. 지난번에 주고 간 돈으로 수도세, 전기세, 유선 세, 전화세, 나 약 조금 사 먹었다. 그리곤 덧붙이는 말은 매번 똑같았다.
“돈을 너무 많이 써 미안하다.”
겨울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추어 산내에 도착했다. 내 손으로 밥을 지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전기밥솥을 열었다. 밥솥에 밥이 반 이상이다. 한눈에 봐도 풀기가 없었다.
“언제 한 밥이요?” “어제 아래” 어머니는 이틀을 먹었는데 며칠은 더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때마다 따뜻한 밥을 해 먹으소,” 그러자 어머니는 잠시 잠깐 나를 쳐다보시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가 얼어 물이 안 나온다.” 어머니는 요 며칠 동안 주전자를 들고 약 오십 미터 떨어진 이웃집에서 물을 떠 와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떠 오는 일이 너무 힘이 들어 며칠 먹을 밥을 한꺼번에 짓는다는 설명이었다. 걷기가 힘겨운 어머니에겐 이웃집이 십 리 산길이었음을 난 모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기어이 구름사다리를 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 봄비가 질척거리는 날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여자 홀몸으로 사 형제를 키워 낸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어머니의 나이 91세였다. 2010년 4월 18일 어머니의 인생 종착역 도착 일력日曆이 삭풍에 시달려온 조락처럼 구겨져 비에 젖고 있었다. 그동안 나의 모든 행동들은 후회투성이고 갚을 수 없는 빚이었다. 어머니 은행은 핏줄이라는 담보에 은행자산 전부를 대출하고도 빚 독촉 한 번 하지 않으셨다. 은행이 파산하도록 나는 원금 한 푼 갚지 않은 나쁜 채권자였다.
눈을 감았다. 까만 허공 무대에선 삼십 대에 홀로되어 유복자(遺腹子)까지 사 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생의 기록이 기억영상물레에서 실처럼 풀려나오고 있었다. 영상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강물에 씻긴 오석烏石처럼 선명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내 나이 여덟 살이었다. 막냇동생은 어머니 뱃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엄마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삼베 치마저고리에, 머리엔 새끼줄을 동여매고, 온몸을 대나무 지팡이에 의지 짚신을 끌며 근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비틀 상여 뒤를 따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짜낸 탓인지 목에서 게워내는 울음소리는 처량했다. 동네 사람들이 눈물을 훔치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홀몸으로 저 어린 것들을 어찌 키우노” 나는 그 중한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상여가 구불구불 아랫마을 앞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 가파른 황토 언덕을 올라가자 나는 저만치 떨어져 어기적거렸다. 누군가가 나의 손을 끌어 상여 뒤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밀어 넣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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