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자연사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1년
이 책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작가 김훈의 상상력이 뿌리내려 이루어진 소설이다. 표지에 '이순신,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라고 작가는 소개한다. 순신이 백의종군에서 풀려나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직후부터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하기까지의 인간적인 아픔과 절망을 시종 1인칭 화법을 구사하여 서술하는 형식이다. 작가는 구국의 영웅이기도 한 장군의 면모보다는 인간 이순신에 초점을 맞춘다. 의주로 몽진을 떠난 선조. 아군보다 열 배 아니, 스무 배나 더 강한 적들. 사기 저하는 말할 것도 없고 그저 도망치기에 바쁜 부하들. 무능한 군주와 신하 된 입장에서의 순신의 답답한 마음, 천군이라 불리는 명군과 자신의 작전과 신념 사이에서의 괴리와 갈등 등, 당시의 총체적 고뇌는 고스란히 순신의 몫이다.
작가 김훈은 대학생 시절 우연히 도서관에서 앞뒤가 다 떨어진 '난중일기'를 감명 깊게 읽는다. 청년 김훈은 언젠가 순신에 빙의해서 침략과 야만의 역사 안에 자신의 뜻을 설파해 보리라는 꿈을 가슴 한쪽에 지니게 된다. 신문기자 출신이었던 김훈은 마침내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스스로 유배형을 선고하고 원고지에 연필로 썼다고 한다. 2개월이 걸렸다. 집필 도중 치아가 무려 일곱 개나 고통도 없이 빠졌다. 충무공이 전사했던 나이와 비슷한 연령대에서 그는 이 작품으로 2001년 동인문학상을 받게 된다. 그해 심사위원들의 평이다. "오랫동안 반복의 늪 속을 부유하고 있는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다." 받은 상금 중 거의 반액이 임플란트 비용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과연 작가 김훈의 문장은 짧으면서도 뜻이 깊고 아름다웠다. 우리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의 고품격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칼의 서늘함과 단호함이 상징적으로 엿보이는 작가의 단단한 결기가 순신의 입을 통해 단순하게 빛났다. 단순함이란 오랜 수련을 거쳐야 도달하게 되는 열매이다. 독자는 마치 자신이 충무공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듯한 감정과 동선으로 독서에 몰입하는 것을 선물로 얻는다. 읽는 즐거움으로 행복지수가 높아짐을 독자는 느낄 것이다. 작품 전체에 골고루 배어 있는 작가 정신이 바닷바람을 타고 격조 높게 휘날린다. 응집력 있는 문장으로 언어를 허비하지 않는다. 책이 세상에 나온 지 십수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독서 인구에게 사랑받고 있는 책이다.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칼의 노래』가 아니어도 많기만 하다. 구국의 성웅이다. 김훈은 전투적인 영웅담도 있지만 어느 시대나 보통 남자들에게서 느끼는 부성애나 가족애로 마음 쓰는 순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묘사했다. 작품 속의 순신은 계속 죽음의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노량해전은 충무공의 몸과 마음을 자연사로 받아들이기에 맞춤한 곳이었다. 몇 년 전에 재미있게 봤던 책을 다시 여유롭게 읽었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혹은 울적할 때,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지만 삶의 여건이 자유롭지 못할 때 한 권의 책으로 자유의 에너지와 건강한 위로를 함께 얻는다. 한 번 읽었던 책은 오래된 친구 같다. 저비용 고효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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