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이슈에 그리 밝지 않은 사람에게도 요즘 '슈퍼 사이클'이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다. 슈퍼 사이클은 통상 20년 이상의 장기적인 가격 상승 추세를 일컫는다. 2000년대 초반 중국과 신흥국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폭등한 '원자재 슈퍼 사이클'은 가장 최근의 예다.
지금 슈퍼 사이클의 주인공은 '메모리 반도체'다. '나 홀로 초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반도체 수요가 폭증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호령해온 우리 기업들이 돈방석에 앉았다. 순이익만 올해 100조원 이상을 넘보는데다 영업이익률은 40%를 웃돌아 '반도체 방석'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누구도 이런 초호황세를 예상하지 못했듯 조만간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하지만 적어도 반도체 덕에 거의 감겼던 한국 경제의 눈이 떠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말하자면 한국 경제가 반도체 호황이라는 심장박동기 세례를 톡톡히 본 셈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한국 경제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중국의 사드 보복 여파로 유통'화장품 기업들이 휘청댔고 외국인 관광객은 급감했다. 2년 가까이 하락세를 거듭해온 수출과 내수 부진으로 '더블딥' 공포가 확산됐다. 천문학적인 가계부채는 정부와 국민 모두의 뒷골을 당기는 고질이었다. 한국 경제는 이래저래 회생 확률이 떨어지는 '언더독' 처지였다.
부지불식간의 슈퍼 사이클에 얹힌 반도체 기업들이 '깜짝 실적'을 내면서 먹구름이 가득했던 기상도가 확 달라졌다. 실적 호전은 코스피 지수를 밀어올렸고 사상 최고치 2,500선도 뚫었다. 올 3분기 1.4%의 경제성장률은 7년 만에 최고치를 다시 써냈다. 일자리난에다 가계부채, 소득 감소에 시름이 깊은 국민들이 내심 곁불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분위기다. 반도체 벼락에 온몸은 몰라도 곱은 손은 녹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커진 것이다.
반도체 산업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지 모두 분석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다만 부지런한 기업이 더 많은 과실을 얻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올바른 선택과 투자, 혁신과 전략적 인내와 같은 마중물이 없었다면 슈퍼 사이클이 가능했을까. 웨이트 워처스의 창립자인 진 니데치의 '인생에서 정해진 운명은 없다. 우연이 아닌 선택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실감 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헌법과 국정을 도륙한 세력을 규탄하고 개혁을 기치로 내건 첫 촛불집회가 29일로 1년을 맞았다. 그때 전국의 거리를 뒤덮은 촛불은 노래로 국민의 상처를 보듬었다. "걱정 말아요 그대"라고. 꽃피는 5월,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제 국정 과제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적폐 청산이 바른 사회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문재인 시대, 우리 정치가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다. 꿈은 새 시대를 향하지만 우리 국민과 정치도 반도체와 같은 슈퍼 사이클을 맞을는지는 짐작 가능함의 밖이다.
행운도 받아들이려는 노력과 준비가 없으면 누릴 수 없다. 기본자세와 경쟁력이 없는데 행운이라고 비켜가지 않을 턱이 있나.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는 바닥도 한참 바닥이다. 경쟁력은 고사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게 한국 정치다. 여야 위치가 아무리 바뀌어도 '집안 싸움'에 '보이콧 국감'처럼 정치 풍경은 달라진 게 없다. 299명 의원 모두에게 오줌싸개 소금 꾸러 갈 때 쓰는 키라도 덮어씌워야 속이 풀릴까.
사람의 힘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산업과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사람이다. 결국 사람을 만들어내는 힘은 바른 정치, 바른 사회 분위기다. 무능한 정치에서 뛰어난 사람이 날 수 없다. 잘사는 나라치고 정치와 사회가 어지러운 나라는 결코 없다. 적폐를 모두 도려낸다고 행운이 깃든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적폐는 적폐대로, 혁신 성장은 성장대로 만들어가야 한다. 수확철 간절한 농부의 심정이 아니면 슈퍼 사이클은 어렵다. 2017년 반도체 슈퍼 사이클은 행운인가, 아니면 예정된 잔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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