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 만난 별들/장재선 지음/작가 펴냄
우리나라 대중문화계의 슈퍼스타 33명의 삶과 예술을 40편의 시(詩)와 33편의 프로필 에세이(profile essay)로 풀어낸 책이다. 1925년생인 배우 황정순부터 최불암, 조용필에 이어 1990년대에 태어난 '소녀시대'까지 시간순서로 묶었다.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 오래 일한 지은이는 "이 책에 나오는 스타들을 접하고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신문사에서 일한 덕분이다"고 말한다. 소설과 시로 등단한 사람답게 33명 스타들의 삶과 예술을 시적 은유로, 그러나 손에 잡힐 듯이 그려낸다.
◇ 과거가 있다고 고백하는 여자에게…
'유엔군 낙하산들이 꽃잎처럼 내렸어요/ 어머나, 하며 쳐다보고 있으니/ 함께 도망치던 사람들이 소리쳤어요/ 빨리 피하라고/ 그 길로 청천강을 건너며 생각했지요/ 이 장면을 전쟁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그 후로 60년/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정말로 500년을 산 것처럼 길고 모질었지요/ (중략) / 눈 위에 연애의 발자국을 찍으면서도/ 영화를 이야기했던 사람/ 과거가 있다고 고백하는 여자에게/지금이 소중하다고 말해 준 사람/ 내 머리에서 옥수수 냄새가 난다며/ 소년처럼 눈웃음 짓던 사람/ 남과 북의 사선을 같이 넘었던/ 오직 유일한 남자였던 내 사랑.(하략)' - 내 사랑 신상옥- 중에서.
영화배우 최은희(1930~ ) 선생의 삶을 노래한 시(詩)다. 이 시를 통해 독자는 최은희 선생이 어릴 때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았음을, 신상옥 감독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음을, 그를 사랑했음을, 납북된 적이 있음을, 신상옥을 만나기 전에 다른 남자가 있었음을, 생이 고달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 작품 뒤에 이어지는 '프로필 에세이'에서 그녀의 삶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배우 최은희 선생은 1961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한국대표 여배우가 되었고, 1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78년 1월 홍콩에서 납북됐으며, 그녀의 남편 신상옥 역시 그녀를 찾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가 그 해 7월 납북됐다.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해 탈북에 성공했다.
지은이는 시 '내 사랑 신상옥'에서 '과거가 있다고 고백하는 여자에게' 라고, 말하는데, 최은희 선생은 신상옥 감독을 만나기 전, 스무 살 무렵에 촬영감독 김학성 씨와 동거한 적이 있다.
◇ 사십대에 양촌리 회장을 지내느라
'(상략)그가 한번 중간에 일어났다/ 팔부 소맥을 일곱 잔쯤 먹었을 때였을 것이다/ 허물없는 술자리라고 해도 어른은 어른인지라/ 그 틈에 나도(이 책의 지은이) 나가 콧구멍에 바람을 넣고 왔는데/ 화장실에서 돌아오던 그가/ 방문 앞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게 보였다/ 댓돌 위에 어지럽게 놓인 수많은 신발들을/ 짝이 맞게 정리하고 있었다/ 알싸한 취기를 숨기지 못한 얼굴이었으나/ 평생 그 일을 해온 사람처럼/ 익숙한 손길이었다/ 삼십대 초반에 수사반장을 하느라/ 몸짓이 일찍 늙은 그가/ 사십대에 양촌리 회장을 지내느라/노틀로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던 그가/ 실제 노년에 들어서는/ 한국인의 밥상을 찾느라/ 젊은 걸음인양 고샅고샅 누벼 온 그가/ 평생 해온 일의 모든 공력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에/ 쓰고 있었다.' - 신발을 정리하는 손-
배우 최불암(1940~ ) 선생의 본명은 영한(英漢)이다. 그가 6세 때 아버지가 3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불암 선생의 큰아버지는 동생의 요절을 슬퍼하며 조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암'이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주셨다. 최불암 선생은 연극 무대에 데뷔한 이래 이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 부처님 바위라는 뜻의 예명 덕분일까, 그는 배우로서 누구보다 긴 호흡을 자랑하고 있다.
◇ 그의 노래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우리 친구 열 명 중 일곱은/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시드러운(고달픈) 길을 걸어왔다/ 그의 노래 열 중 일곱은/ 외워 부르며/ 쓸쓸한 시간들을 견뎌 왔다/ 그의 노래를 모르는 이는 없지만/ 그를 아는 사람도 없다/ 이 나라의 가왕으로 살아온/ 세월의 뒤편에서 노을을 벗한/ 적막을 누가 알겠는가. (하략) -바람의 노래를 멈추지 않는- 중에서
가수 조용필(1950~ )은 한국 대중음악의 신화다. 그 신화는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는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은이는 조용필 프로필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나는 기억한다. 작가 최인호가 1980년대 어느 날 신문에 "20세기가 저물 무렵 조용필도 늙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던 것을. 그 조용필이 21세기에도 늙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당대인들과 교감하고 있다.'
그리고 또 이렇게 썼다.
'조용필은 특유의 소박한 말투로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어떤 말을 하다가는 민망한 듯, 수줍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 스타의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에게 어찌 저리도 절박한 모습이 남아 있을까. 나는 경이를 느꼈다.'
그 절박함이 조용필을 '영원한 청년'으로 남게 했을 것이다.
◇ 비바람에 시달려도 둥글게 살아가리
'조약돌'의 가수 박상규(1942~2013)는 '쌩큐 아저씨'였다. 타고난 입담으로 객석을 들었다 놨다 다. 스탠딩 개그의 원조였고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의 명사회자였다. 타고난 예능인이지만 그의 어릴 때 꿈은 국어교사였다. 그 꿈을 이룰 요량으로 연세대 국문학과에 진학했는데, 교내 축제에서 노래와 연극으로 숨어 던 재능을 발견하고 말았다. 모범생 우리 아들이 '딴따라'가 되겠다니! 부모님의 반대가 격했고, 그는 인천의 집에서 뛰쳐나와 하숙을 하며 노래공부를 했다.
재능과 실력이 있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10년 동안 무명 월을 보냈고, 1974년 '조약돌'로 스타덤에 올랐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살아가던 한국인에게 박상규의 '조약돌'은 커다란 위안이었다. 당시에 앨범이 100만여 팔렸다.
2000년 생각지도 못했던 고혈압으로 쓰러져 언어장애를 겪었다. 병과 싸우면서도 무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2006년 호주 시드니에서 교포 위문공연을 열었다. 불굴의 의지가 낳은 무대였다. 2008년에 또 쓰러졌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 "실례하겠습니다, 한 번에 끝내겠습니다"
"젊은 배우들과 키스신을 할 때도 긴장했던 기억이 있는데, 안성기 선배님과 키스는 제가 나쁜 짓을 하는 느낌이었어요.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한번에 끝내겠습니다'라는 분위기였지요. 그때 선배님은 진지하셨고, 저는 너무 좋았습니다."
영화배우 안성기(1952~ )에 대해, 배우 이하나가 털어놓은 이야기다. 짧은 글에 소탈하고 반듯하고 성실한 안성기 씨의 품성을 고스란히, 그리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배우 안성기 프로필 에세이에 실려 있는 글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대중문화계 스타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배우 황정순, 최은희, 신구, 영화감독 임권택, 가수 패티김, 배우 김지미, 최불암, 가수 겸 방송 진행자 박상규, 화수(畵手:화가 겸 가수) 조영남, 영화감독 이장호, 가수 조용필, 최백호, 배우 안성기, 강석우, 가수 현숙, 최성수, 배우 송강호, 배우 겸 작가 차인표, 가수 겸 배우 엄정화, 배우 김윤진, 김정은, 하지원, 수애, 전지현, 화가 겸 배우 강예원, 가수 겸 배우 성유리, 배우 손예진, 하석진, 문채원, 박하선, 김옥빈, 그룹 하이라이트 리더 윤두준, 걸그룹 소녀시대. 240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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