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를 읽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엮음'옮김/ 레드박스 펴냄
귀를 자른 남자가 있다. 광기의 천재, 태양의 화가, 불멸의 화가로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빈센트 반 고흐다. 목사가 되고자 신학공부를 했던 그는 스물일곱 살이 돼서야 화가가 되기로 한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끝없는 사랑을 꿈꾸는 남자였다. 하숙집 딸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 뒤 사촌 동생, 매춘녀, 열 살 연상의 여인 등 사랑하는 사람마다 가족의 반대에 부닥치며 좌절한 그에게 남은 것은 동생 테오와 그림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생의 지원으로 겨우 캔버스를 채워가면서도 그림을 돈과 바꾸는 데 주저했고, 함께 지내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고갱과는 두 달 만에 극심한 불화로 헤어지고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지독한 가난과 고독이 만든 그의 처절한 삶은 그의 나이 서른일곱에 권총 한 발로 마무리됐다. 영혼의 동반자이자 절대적 후원자인 동생 테오는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6개월이 지나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생애는 그가 남긴 삶의 기록이 가장 잘 설명한다. 미학자이자 번역가인 신성림이 반 고흐 편지 선집 '반 고흐를 읽다'를 펴냈다. 이 책은 고흐가 1875년 10월부터 1890년 7월까지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다. 고흐는 1872년부터 일기를 쓰듯 편지를 썼다. 동생 테오와 어머니, 여동생, 반 라파르트, 베르나르, 고갱 등에게 남긴 편지는 800통이 넘고, 이 가운데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668통에 이른다. 실패한 사랑, 가족과의 갈등, 소소한 일상, 그림 작업에 대한 기록, 작품에 대한 해설, 당시 미술계와 동료 화가에 대한 평가, 생애 의지와 좌절 등 그의 모든 것을 담은 편지들은 '광인 아니면 천재'로 알려진 그의 예술적 사고뿐만 아니라 인간적 면모까지 깊숙이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한 편의 자서전이라 할 만한 편지로 그의 그림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이 책이 반갑다.
◆책, 돈. 숨겨진 이야기
외롭고 고독했던 그에게 책은 숨겨진 벗이었다. 제본업자의 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평생 책을 가까이했던 그는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등을 읽고 다양한 영감을 얻었고, 때론 테오에게 책을 읽기를 권한다.
'에밀 졸라의 책을 가능한 한 많이 읽어라. 그의 책은 훌륭하고 매사를 명료하게 알려준다'-1882년 7월 헤이그에서
'빅토르 위고는 신이 빛을 깜빡이는 등대라고 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빛이 가려진 일식의 시기를 거치고 있나 보다'-1888년 9월 아를에서
'인간을 초월한 무한의 일별을 셰익스피어의 책에서 많이 마주치게 된다'-1889년 6~7월 생레미에서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큰 적은 돈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그림 작업에 쓰이는 돈과 생활비를 테오에게 의지했다. 자신이 테오에게 너무 큰 짐이 되는 것 같다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서 받은 돈을 갚을 수 있도록 그림을 더 많이 그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테오가 돈을 내야 할 곳이 너무 많아서 당분간 형이 스스로 생활을 꾸리길 바란다고 하자, 고흐는 "내가 너의 채권자들보다 못한 존재냐"라며 "물감 값 청구서는 내 목을 밧줄처럼 조여오는데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야 한단 말이다"고 역정을 내기도 한다. 화가 인생 10년 남짓 동안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아를의 침실' '별이 빛나는 밤' 등 800점 이상의 그림을 남긴 고흐였지만, 물감 한 통, 캔버스 한 장을 살 돈이 없었고, 생전 팔린 작품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단 한 점이었다.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그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달라졌다. 드라마틱한 그의 생애가 작품의 후광이 되었고,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그림의 현재 가치는 수백, 수천억원이다.
◆성장과 창작에 얽힌 진솔한 고백
그의 편지 중 미술사에서 눈여겨 볼만한 부분은 작품에 대한 설명과 스케치, 당대 미술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다. "밀레의 드로잉을 본뜬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순한 모사라기보다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더 비슷하다"며 밀레의 그림으로부터 활기를 되찾았다고 말한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가 영혼을 가졌듯이 렘브란트는 자신을 닮은 이 늙은 남자 안에 다빈치의 미소를 가진 초자연적인 천사를 그려놓았네"라며 찬사를 보낸다. 밀레, 렘브란트, 들라크루아 등 그가 사랑했던 화가들에 대한 흠모도 엿볼 수 있다.
화가로서 고흐 인생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아를에서 그는 고갱을 기다린다. 비슷한 처지의 화가들과 여러 작업을 시도하려고 했고, 예술공동체를 만들어 공동 화실에서 작품을 만들어 가겠다는 그의 계획은 고갱을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고갱과의 생활이 시작되지만, 각자의 예술관은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만들었고, 고갱과 다툰 뒤(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그의 귀를 잘랐다.(잘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고갱은 고흐를 떠났다. 이후 고흐의 정신 착란, 환각, 신경쇠약 증세는 더 심해진다. 고갱이 떠난 것이 큰 재앙이라고 하거나, 고갱의 천재성을 인정하는 대목에서 동시대 화가에 대한 그의 고백을 알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고독과 두려움이 만들어낸 반복된 기행(奇行)과 발작, 정신이상 증세로 고흐는 결국 정신병동에 입원한다. '노란 집' '밤의 카페' 등 200여 점의 걸작을 탄생시킨 아를을 떠나 생레미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문다. 끔찍한 우울증에도 작품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었고 최후의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밀밭에서 권총 한 발로 생을 마감한다. 총알이 빗겨간 심장이 잠시 뛰는 동안 그의 옆에는 일생의 친구, 테오가 있었다.
한 권의 책으로 고흐를 전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생을 이해할 만한 또 다른 방법이 있을까. 492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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