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말 한마디에 원전 공사 중단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제왕적 행태'
국가의 중차대한 일일수록 공론화
모든 정치적 절차 법의 지배 받아야
1998년 12월 정부는 울산시 울주군 등지에 8기의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을 발표한다. 당시 울주군수 등은 세수증대를 이유로 원전 건설에 대해 지지의사를 표시하였다. 반면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핵발전소 유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정부는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0년 9월 울주군 서생면에 신고리원전 1호기를 건설하기로 확정하였다. 울산 주민들은 물리적 시위에만 그치지 않고 반대의사 관철을 위한 법적 절차를 밟기도 했다. 울산시 주민 13만여 명은 2000년 11월 국회에 신고리 원전 철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반응이 없자 서생면 주민들은 주민투표를 요구하고 나섰다. 원전 유치 여부는 '주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으로 지방자치법상 주민투표 사안임이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다른 데서 생겼다. 주민투표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주민투표의 대상'발의자'발의요건'기타 투표절차 등에 관하여는 따로 법률로 정한다'는 지방자치법에 따른 법률 제정 임무를 국회가 소홀히 한 결과였다. 원전 건설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해 볼 수 있었던 기회는 그렇게 무산되었다. 2004년 주민투표법 제정 이후에도 원전 건설 문제는 국가사무여서 주민투표 대상이 아니라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소식을 접하며 주민투표법 연혁이 떠올랐다. 정부는 공론화위원회 평가를 거쳐 시민 배심원단이 공사 중단 여부를 최종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문재인정부의 '탈핵국가' 목표 실현을 위한 시동이 걸린 것이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라는 이유로 일사천리로 추진되고 있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앞으로 원자력발전소를 더 지을지 여부는 정부가 결정할 수 있다. 새로운 정부가 지난 정부와 다른 정책을 채택할 수 있다. 논란이 많은 에너지 정책 전환 여부도 정부의 권한이다. 신재생에너지나 천연가스 발전 등이 원전을 대체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관련된 과학 분야의 전공자들이 신물 나게 논쟁하는 주제이다. 비전문가가 섣불리 끼어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진행 중인 공사를 중단하고, 시민 배심원단이 최종 결정을 하도록 하는 것은 심각한 법률적 문제를 낳는 일이다. 한마디로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초법적 발상이다. 공사중단 결정은 법률상 원자력안전위원회만이 할 수 있다. 대통령은 물론 시민 배심원단이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제'와 다름없다. 대통령의 한마디로 국가정책이 좌우되고 모두가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면 말이다. 원전 중단은 정의롭기 때문에 절차가 중요하지 않다는 발상일 수도 있다. '핵 없는 세상'이라는 원대한 비전의 실현에 법을 따지는 게 따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의 중차대한 일일수록 공론화와 법률 제정 절차를 거치고 그에 따르는 것이 결국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길이다. 20여 년 동안 끈질긴 논의를 거쳐 2002년 탈원전의 비전을 담은 개정 원자력법을 만들어낸 독일이 대표적이다. 그 이후 독일은 더 이상 원전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을 벌이지 않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치질서의 기원'에서 정치발전의 구성요소로서 3가지를 열거한다. 국가건설(state building), 법의 지배(rule of law), 그리고 책임정치(accountability)가 그것이다. 후쿠야마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근대국가를 건설한 나라는 중국이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에는 법의 지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책임정치도 찾아볼 수 없다. 법의 지배 없이는 책임정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정치와 법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국가발전에 있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는 분석이다. 대통령 탄핵은 걸핏하면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정치적 전통이 부른 비극이다. 문재인정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따라서 모든 정치적 절차를 법의 지배 아래 두려는 노력이다. 탈원전이든 탈핵이든 그 어느 것도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법이 없기 때문에 주민투표를 못 했다면 법이 없기 때문에 시민 배심원단이 최종 결정을 해서도 안 된다. 필요하다면 법을 제정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