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개척史 '검찰사의 길'을 걷다] <1>"가 닿으라"…울진 구산포~울릉 학포

입력 2017-06-21 00:05:00

"일본인의 수탈 살피라" 어명에 사흘 밤낮 뱃길 1600리 달리다

이규원이 울릉도에 첫발을 디딘 서면 학포마을. 섬 서쪽 끝자락에 있는 이곳은 깎아지른 해안절벽 등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아담한 포구다.
이규원이 울릉도에 첫발을 디딘 서면 학포마을. 섬 서쪽 끝자락에 있는 이곳은 깎아지른 해안절벽 등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아담한 포구다.
이규원이 울릉도에 첫발을 디뎠다고 기록한 \
이규원이 울릉도에 첫발을 디뎠다고 기록한 \'소황토구미\'는 서면 학포마을이다. 학포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학포 캠핑장 내 이규원 검찰사 묘비석. 경기도 김포시 외곽에 있었으나 2006년 김포 신시가지 도로확장 공사 때 철거돼 이곳으로 옮겨왔다.
학포 캠핑장 내 이규원 검찰사 묘비석. 경기도 김포시 외곽에 있었으나 2006년 김포 신시가지 도로확장 공사 때 철거돼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워진 섬' 울릉도에 개척령이 내려진 지 135년이 지났다. 개척에 앞서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했다. 일본인이 무단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벌목해가는 일이 잦던 당시, 이규원은 섬 곳곳을 검찰한 뒤 보고서를 남겼고, 이를 토대로 울릉도 재개척의 역사가 시작됐다. 박시윤 작가와 함께 이규원의 행적을 살폈다. 작가의 상상력을 덧댄 팩션에 해설기사가 뒤따르는 식이다. 고종의 영토수호 의지와 검찰일기가 갖는 의미 등을 10회로 나눠 짚는다.

"가 닿으라"…울진 구산포~울릉 학포

파도가 솟구쳤다. 키질하듯 흔들리는 세 척의 배 안에서 목숨 일백이 놀아 움직였다. 눈알이 뒤집힌 사람들의 콧구멍과 목구멍에서 삭다 만 밥알이 쏟아졌다. 사람과 짐짝이 엉겨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사공 박춘달의 낯이 허옇게 질렸다.

"바다가 끓는다. 노를 놓아서는 안 되네. 최대한 멀리 나아가야 하네."

사공이 멀건 거품을 토하며 소리쳤다. 파도는 이물과 수백 수천 번 맞붙었다. 죽음의 바다 위에서 힘줄이 터지도록 노질을 해대는 사내들의 내일이 사나웠다. 이물과 파도가 부딪힐 때마다 배는 나아가야 할 향방을 잃고 흔들렸다. 왕이 내린 용 깃발이 쓰러졌다. 사공은 이물에서 고물까지 굴러 가 간신히 붙어 있었다. 장정 서너 명이 달려가 그를 간신히 끌어올렸다.

"나으리, 이대로 계속 나아갈 것이옵니까?"

불안해진 사람들을 대신해 중추원도사 심의완이 물어왔다. 그의 말은 일백의 목구멍에서 올라온 말들이 들러붙어 어둡고 무거웠다.

"나으리, 어찌할깝쇼?"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은 침묵했다. 배가 휘청거릴 때마다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뒹굴었다.

"나으리, 동풍에 파도까지 용솟음쳐 풍세가 여간 불리하지 않사옵니다."

어두운 사위 속으로 말들이 흩어졌다. 배와 배의 거리가 멀어 또렷하지 않았다. 살아나려고도 죽으려고도 하지 않는 배는 무기력했다.

"나으리, 역풍이 여간하지 않사옵니다. 이대로 가다간…몰살이옵니다."

다급해진 군관출신 서상학과 전 수문장 고종팔이 속내를 드러냈다. 파도는 배가 나아갈 방향을 더욱 미궁으로 몰아갔다. 규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녕 가 닿을 수 없는 땅이란 말인가?'

규원은 두려웠다. 저무는 하루가 두려웠고, 살아 반들대는 일백의 눈이 두려웠고, 흐릿해져 가는 왕명이 두려웠다. '전하, 어찌하오리까. 미천한 자의 지혜가 고갈되어 진정 향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규원은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배 안에서 임금을 떠올렸다. 달포 전이었다. 규원이 사정전에 들자 임금은 어좌에서 마룻바닥까지 내려와 그를 맞았다.

"근래에 울릉도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함부로 왕래하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조정이 개척에 마음을 단단히 두고 너를 파견하여 탐사코자 한다. 나랏일에 근면하고 위험을 피하지 않는 너를 특별히 천거한 것이다. 내 친히 용 깃발을 내릴 것이니 사명을 다해 소상히 탐사한 후 아뢸 것이다."

임금의 말은 떨렸고 다급했다.

"전하, 황공하옵니다. 소인 명을 받들어 목숨을 다하겠나이다!"

임금이 규원의 손을 잡았다. 미미하게 떨리는 임금의 손이 차가웠다.

격정의 밤을 지나 아침노을이 붉게 번졌다. 바다는 쥐죽은 듯 잠잠했다. 규원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사위를 살폈다. 사공은 이물에 홀로 서 있었다.

"순풍이다! 해가 뜨는 쪽으로 이물을 돌려라! 돛을 올려라!"

"분명 믿을만한 바람이 맞느냐?"

"예, 나으리! 분명 맞사옵니다."

규원의 절규 섞인 물음과 사공의 울음 섞인 대답이 낙엽처럼 가벼웠다.

"왕명이다! 무기력하지 마라. 이대로 물 위에서 죽으려 들지 마라."

고종팔과 서상학이 쓰러진 깃발을 이물 돛대 옆에 돋아 세웠다. 해가 솟는 쪽으로 용이 승천하듯 깃발이 힘차게 펄럭였다. 해는 따스했으며 바람은 순했다.

"나으리! 저…저기! 저기 보입니다요!"

'헛것이더냐, 참말이더냐?' 아득히 먼 곳으로 섬이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봉두난발한 규원이 절했다. 심의완, 서상학, 고종팔이 따라 절했다. 그 뒤로 일백의 이마가 낮고 깊게 바닥에 가 닿았다.

박시윤 작가

[해설]

◇1882년 고종 '울릉도 개척령'…日 무단 행위 막다

◆목숨 건 32시간 항해

고종은 1882년 12월 '울릉도 개척령'을 내렸다. 이전 울릉도는 수백 년 동안 비워진 섬이었다.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탓에 조선 태종 이후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 '쇄환정책'을 펴왔던 터였다. 대신 2, 3년에 한 번씩 수토관을 보내 섬을 관리했다.

고종 때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고기잡이하거나 벌목을 해가는 일이 잦았다. 1881년 수토관으로 울릉도를 둘러본 삼척영장의 보고에 따라 고종은 울릉도 재개척을 염두에 두고, 1882년 이규원을 울릉도로 보내 섬의 상황을 낱낱이 보고토록 했다.

이규원은 10여 일 동안 울릉도 전역과 해안을 검찰한 뒤 보고서와 지도를 작성해 올렸다. 이를 바탕으로 고종은 이듬해인 1883년 16가구 54명을 이주시키면서 울릉도 재개척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종은 이규원을 통해 일본인의 자원수탈 상황을 살피고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가를 판단하고자 했다. 울릉도 주변 부속섬에 관한 정보수집도 검찰의 주된 임무였다.

이규원이 울릉도로 향한 것은 135년 전 이맘때다. 이규원은 1882년 4월 29일, 양력으로는 6월 14일 평해(지금의 울진) 구산포를 출발한다. 3척의 배에 나눠 탄 일행은 100여 명에 달했다.

동해 뱃길은 거칠다. 파도가 심한 날엔 배가 결항하기 일쑤고 배가 뜬다 해도 뱃멀미로 심한 곤욕을 치러야 한다. 포항~울릉 뱃길을 오가는 정원 900여 명 규모의 여객선이 올 들어 4일에 한 번꼴로 결항한 것으로 미뤄보면 30여 명을 태운 작은 목선의 항해는 더욱 위험하고 어려웠을 것이다.

이규원은 항해 첫날 29일 일기에 이렇게 썼다. '회오리바람에 세 척의 배가 대해(大海)에 낙엽처럼 떠돌았다.' 맹렬한 소용돌이 바람인 용오름까지 만난 것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동해에선 용오름이 매년 수차례 발생한다.

검찰사 일행은 30일 오후 6시쯤 울릉도에 도착했다. 구산포를 출발한 지 32시간 만이었다. 이규원은 30일 자 일기에 '사흘 낮과 밤을 물길로 왔으니 아마 1천600~1천700리는 될 듯하다'고 적었다. 실제로는 이틀이 걸렸지만 사흘로 생각했고, 직선거리로 130여㎞인 뱃길을 1천600리(640㎞)로 추정했을 만큼 항해는 힘겨웠다. 결국 이규원의 울릉도행은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이규원이 첫발 디딘 소황토구미는 '서면 학포마을'

◆섬 서쪽 학포에 첫발

이규원이 울릉도에 첫발을 디뎠다고 기록한 '소황토구미'는 서면 학포마을이다. 섬 서쪽 끝자락에 있는 이곳은 깎아지른 해안절벽 등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아담한 포구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는 박봉식(74) 전 학포어촌계장이 말했다. "옛날 저기 위쪽 후박나무 숲 속에 학을 닮은 바위가 하나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마을 이름이 학포라요. 지금은 머리 부분이 무너져 학 모습은 사라졌지요."

학포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버스를 타고 학포정류소에 내리면 황동색 학 두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모습의 조형물이 보인다. 조형물 옆으로 난 가파른 굽잇길을 15분쯤 걸어 내려가면 포구에 이른다. 울릉읍 도동에서 차로 30여 분 거리다.

굽잇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경관이 빼어나다. 포구로 내려서면 마을 좌우엔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무너져 내리며 만들어진 절벽이, 포구 앞엔 아담한 몽돌 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울릉도 근해에선 고등어가 오징어만큼이나 많이 잡혔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1928년 6월 17일 자에 '동해안 연안에 고등어 대풍획'이란 기사를 실었다. "6월 울릉도 해안에서는 매일 5만여 마리의 고등어가 잡혀 산같이 쌓이고 있는데, 대부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수출한다"는 내용이다. 박봉식 씨가 인적이 끊어진 바닷가 낡은 집 바닥을 들추며 말했다. "옛날 이 마을엔 일본인도 여럿 살았대요. 여긴 '무라시마'라는 일본 사람이 살던 집인데, 이게 '간통'이라요. 고등어 같은 생선을 염장해 보관하던 창고 같은 거지요. 이렇게 보관한 생선은 일본으로 실어 갔대요."

학포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엔 130여 가구에 이를 만큼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떠나고 20여 가구만 남았다.

이 마을 팔각정 뒤 바위엔 당시 이규원 일행의 이름을 새긴 '임오명 각석문'이 남아 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