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의 한시 산책] 옥돌로 깎아 만든 듯, 허공에 두둥실 뜬 반달

입력 2017-06-03 00:05:05

반달을 읊음 영반월(詠半月) 황진이

누가 곤륜산의 옥을 깎아서 誰斲崑山玉(수착곤산옥)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가? 裁成織女梳(재성직녀소)

견우가 한번 가버린 뒤에 牽牛一去後(견우일거후)

시름 겨워 벽공에다 던져버렸네 愁擲碧空虛(수척벽공허)

이 시를 지은 황진이(黃眞伊)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다. 하지만, 황진이만큼 확실한 것이 거의 없는 사람도 별로 없다. 생몰 연대부터 미상인데다, 생애에 대한 확실한 기록도 거의 없다. 다만, 이런저런 야사들 속에서 긴가민가한 일화들과 함께 여기저기 등장할 뿐인데, 기록마다 내용이 다르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의 생애는 이미 천길만길의 안개로 뒤덮여서 신화와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황진이가 아주 특별한 존재로 바로 우리 곁에 남아 있게 된 것은 그녀가 남긴 빼어난 시조들 때문일 게다. 다 합해봐야 여섯 수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시조들은 시조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보더라도 단연 최고의 절창들이다. 2006년 시조 전문 문예지 '나래시조'에서 시조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하여 옛날 우리나라 시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이 무엇인지를 조사한 결과, 그녀의 '동짓달 기나긴 밤'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어저 내일이야'와 '청산리 벽계수야'도 무난히 10위권 안에 들었다. 수필가 피천득과 윤오영, 시조시인 김상옥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향가 이래 우리나라 최고의 고전 시가가 무엇인지를 논의하다가 '동짓달 기나긴 밤'을 만장일치로 뽑았다는 일화도 있다.

워낙 시조로 유명하다 보니 황진이의 한시는 상대적으로 묻혀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녀의 한시가 도달한 수준도 절대 만만하지 않았으며, 위의 작품은 바로 그 단적인 증거에 해당한다. 보다시피 이 작품은 작자가 무심코 허공에 떠 있는 반달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발동한 상상력에서 시상이 시작된다. 저 하늘에 떠 있는 반달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을까? 아마도 누군가가 곤륜산의 옥돌로 반달 모양의 빗을 만들었겠지. 그 빗은 직녀의 소유가 되었고, 직녀는 그 빗으로 사랑하는 견우에게 더 아름답게 보이려고 치렁치렁 머리를 빗었으리라. 하지만, 견우는 직녀를 남겨두고 은하수를 건너 훌쩍 떠나버렸어. 여자는 원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곱게 빗는 법. 사랑하는 견우가 없는 세상에서 빗 따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직녀는 그 빗을 허공에다 힘껏 내던져버렸고, 그것이 하늘의 반달이 되었으리라.

그럼 곤륜산의 옥을 깎아서 직녀의 빗을 만든 이는 누굴까? 말할 것도 없이 견우일 게다. 견우가 만들어 두었다가 직녀의 생일날이나 화이트데이에 곱게 포장하여 선물한 빗, 그 빗이 지금 저 푸른 하늘의 반달로 두둥실 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작 스무 자에 불과한 짤막한 한시 속에 사랑과 이별을 소재로 한 소설 한 권이 들어 있다. 아주 짧으면서도 매우 긴 시를 이토록 깜찍하게 형상화해내는 황진이의 예리한 관찰과 절묘한 비유, 빼어난 상상력에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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