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초심과 배신

입력 2017-05-25 00:05:02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올해 1월 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경내 '상춘재'로 초대했다. 명분은 신년 인사차 기자들에게 다과를 대접하며 담소를 나눈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탄핵 과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변명하는 자리였다.

그는 "상춘재는 임기 중 오늘 처음 오픈하는 것으로, 기자 여러분이 첫 손님"이라고 생색을 냈다.

박 전 대통령이 임기 4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 처음 문을 연 상춘재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일 만에 활짝 열어젖혔다. 여야 5당 원내대표와 첫 오찬회동을 하면서 여'야'정 협의체, 개헌 등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눴다.

한옥 상춘재는 대통령이 국빈 등 외부 손님을 접견하거나 비공식 회의를 통해 국정을 논하는 공간이다.

박 전 대통령이 임기 후반까지 상춘재 문을 잠가 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는 국빈 방문, 국무회의, 수석비서관회의 등 공식 일정을 제외하고는 청와대 본관이나 위민관(현 여민관)보다 사저에 머문 시간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미뤄볼 때 박 전 대통령은 '국정'보다는 개인 공간에서의 '사색'에 더 치중한 듯하다.

이런 면에서 국정을 외면하거나 농단한 지도자를 '배신한' 유승민 바른정당 국회의원이 새삼 돋보인다. 국정을 농단하고, 불통'무능한 지도자를 배신하지 않고 추종만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 아닐까.

'신의를 저버린다'는 뜻의 배신은 다 같은 배신이 아닐 터다. 신의는 바르고 정의롭고 따뜻한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다. 도둑이나 강도, 사기꾼에 대한 신의는 공범이 지켜야 할 도리에 불과하다. 국정을 농단하는 지도자 곁에서 모른 척하거나 부화뇌동한 이들을 신의나 의리란 이름으로 두둔하는 집단이 바로 '수구꼴통'들이다. 최순실 사태 이후 이들 집단이 건전한 보수를 함께 욕보이고 있다.

국정 농단 세력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을 탈당, 바른정당을 창당한 뒤 다시 탈당해 도로 합류한 13명. 국회 국정 농단 청문회장에서 '포청천'처럼 증인들을 준엄하게 꾸짖던 이들이 '보수의 재건'이란 구차한 변명을 앞세워 자신들이 욕하고 나왔던 당으로 다시 들어갔다. 유승민 의원이 국정 농단 지도자에 대해 '명분 있는 불가피한 배신'을 했다면 이들은 건전한 보수에 대해 명분도 이해의 여지도 없는 '치졸하고 저급한 배신'을 자행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서민친화적인, 열린 소통 행보가 연일 화제다.

식판을 손수 들고 청와대 직원과 점심을 함께하고, 비정규직에 관심을 갖고, 기자들과 산에 오르며 소통하고, 5'18 유족을 아버지처럼 다독여주고…. 검찰과 재벌 개혁을 겨냥한 인사를 전광석화같이 단행하고, 전 정부 인물이나 코드가 다른 인물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로 등용하는 용인술로 '준비한 대통령'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문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3철(이호철, 전해철, 양정철)을 비롯한 측근들의 퇴장이나 비켜섬도 박근혜정부의 '문고리 3인방'과 '십상시'와 오버랩 되면서 진가를 더하고 있다. 자신들이 믿는 지도자와 정권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칠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고뇌에 찬 결단이다. 그 지도자에 그 참모다.

문재인정부의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 가슴 짠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전 정부에서 전혀 겪어보지 못한 신선한(?) 경험 때문인 듯하다.

문재인호(號)는 비록 국내외 여건은 녹록지 않지만 어느 때보다 좋은 주변 환경 속에서 출항했다. 측근들은 암초가 될 만한 걸림돌을 미리 걷어냈고, 대다수 국민들은 선장에게 따뜻한 눈길과 신뢰를 품은 채 몸을 실었다.

무엇보다 초심이다. 초심을 잃지 않는, 참모들이 배신하지 않는, 5년 뒤 떠날 때 박수받는 대통령을 고대한다. 그것이 바로 국민을 배신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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