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불천위 제삿밥

입력 2017-05-22 00:05:01

제사를 지내려고 일가친척들이 모였다. 서둘렀더니 그날따라 준비가 일찍 끝났다. 조금 쉴 요량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가 깜빡 졸고 말았다. 그런데 가족 중 한 사람이 특이한 꿈을 꿨다. 갓 쓰고 도포 입은 노인 몇 분이 동구 밖으로 떠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한 노인이 이렇게 말했다. "모처럼 밥 얻어먹으려고 친구들하고 후손 집에 왔는데 제사를 안 지내네." 놀라서 눈을 떠보니 시곗바늘이 자정을 한참 넘어가는 중이었다.

필자의 돌아가신 할머니가 꿨다는 꿈 이야기다. 조상들이 진짜로 현몽했는지, 제사를 시간에 맞춰 지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꿈으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꿈 이야기로 인해 집안 어른들은 제사 때 조상들이 찾아온다는 믿음을 더욱 확고히 갖게 됐다.

기본적으로 제사는 영혼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예식이다. 반면, 유교가 무신론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제사가 조상에 대한 존경심을 되새기고 후손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가정의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기일(忌日)에 제일 먼저 조상에게 음식을 올려야 한다는 이유로 자정을 넘긴 시간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조선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초저녁에 제사를 지내는 가정들도 늘어나고 있다. 제사를 지낸 뒤 새벽에 전국 각지로 돌아가는 부담이 만만치않아서다.

심지어는 '뼈대 있는' 가문의 불천위(不遷位) 제사도 저녁 시간대로 바뀌고 있다. 불천위란 많은 공을 세웠거나 학문과 덕이 높은 조상들의 제사를 후손들이 영구히 모시는 것을 말한다. 훌륭한 조상이 많은 종가일수록 불천위 제사가 많을 수밖에 없다. '문중 종가에서는 1년에 제사를 수십 번 지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종택은 전국에 200곳쯤 되는데 이 중 절반 이상이 경북에 있고 50여 곳이 안동에 있다. 이 중 안동에 있는 의성 김씨 청계종택이 불천위 제사 시간대를 오후 8시 20분으로 최근에 바꿨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경북의 종가 중 절반 정도가 현실에 맞게 불천위 제례 방식을 바꿨다고 한다.

초저녁 시간대의 불천위 제사는 후손(제관)들의 참석을 늘리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고수하는 것 못지않게 시대와 환경에 걸맞게 바꾸어 나가는 것 역시 전통의 중요 미덕이다. 조상들로서도 후손들이 제사 모시느라 너무 많이 고생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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