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15>-엄창석

입력 2017-05-01 12:21:21

이즈음 광문사는 대구뿐 아니라 경상도 각처의 지식인들과 상업 자본가들이 집결하는 장소였다. 동래 경무관을 지낸 김광제가 광문사를 설립한 게 1906년 1월이었다. 1905년 11월에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김광제는 경무관 직을 사임하고 곧장 대구로 올라와서 출판사를 설립했다. 충청도 보령 출신인 그가 대구로 올라온 것은 일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일인들은 상권을 개척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으로 대구를 선택했고, 이에 맞선 김광제도 신교육 운동의 터전으로 대구를 꼽은 것이다.

그의 활약을 접한 광무황제는 자금과 교육칙유를 내려 보냈고, 당시 신태휴 관찰사도 성 안의 취고수청 건물을 제공했다. 광문사를 세운 지 6개월 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런 뒤로 일본 통감부의 지방 조직인 이사청이 성 안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도움을 주던 관찰사가 이임을 했고, 광문사는 일본 수비대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상업 자본가들과 지식인들이 모여서 자강운동의 방법과 방향을 두고 토론을 벌였다.

계승은 화로에 숯을 넣어 불을 피우면서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감영 정문인 관풍루에서 중삼문을 거쳐 징청각에 이르는 곧은 길로 일본 수비대가 척척 발을 맞추며 행군을 했다. 제복을 입은 기마병들도 위세를 떨며 관청 앞을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수비대의 행군에서 별다른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계승은 화로를 회의실로 옮기고, 청소를 하고, 동료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었고, 인쇄실로 돌아왔다. 채자 상자에서 활자를 뽑는 일은 김이, 교정쇄를 검토하는 일은 최가, 조판은 권종성이 맡고 있었다. 권종성이 인쇄실로 들어선 계승에게, "오늘부터 임형도 판을 짜보시오."하고 말했다. 계승이 김과 최보다 나이가 많아 허드렛일만 시킬 수 없다는 투였다. 계승은 권종성과 나란히 식자대에 앉아 원고를 들여다보면서 김이 뽑아온 활자를 작은 조판틀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그러는 사이 옆방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리고 장지문도 몇 차례 열고 닫혔다. 회의를 하러 들어온 인사들은 대체로 쉰 살 안팎의 초로들이었다. 마흔한 살인 김광제가 가장 젊었다. "이사람, 새로 들어왔나 보네?" 누군가가 다가와 계승의 등을 두드렸다. 계승은 한문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양, 활자를 틀에 정교하게 맞추는 데 골똘하는 척했다. 인사들이 우르르 방을 나갔다. 뜨거운 홍차를 후루루 마시는 소리, 안부를 주고받는 화통한 목소리, 장죽 대가리로 화로 끝을 때리는 소리, 두루마기를 휘휘 젖히는 소리, 가래를 긁는 소리가 닫힌 장지문으로 들려왔다.

"황제폐하께서 도성을 아예 뜯어고칠 작정인가 봅니다. 길을 크게 넓히고 전염병이 돌지 않도록 청결하게 한답니다. 경북궁 안, 집옥재에 4만 권의 책을 들여놓고 신문명을 어떻게 도입할지 모색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 계승의 등을 두드린 이일우의 목소리였다. 그는 두 해 전, 망경루 건너에 우현서루(友弦書樓)라는 의숙을 세우고 수천 종의 서적을 구비하여 젊은이들을 모으고 있었다. 날카로운 김광제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황제의 정치력은 믿을 수 없어요. 오래전 얘기지만 심야를 타서 독립협회를 제거하신 것도 황제폐하지요. 물론 교활한 러시아 여우들이 뒤에서 책략을 쓴 거지만. 문제는 권력이 황제, 한곳에만 집중되어 있으니, 황제만 잡히면 나라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소남(이일우)께서 말씀하신 경복궁 앞 대로도, 제가 서울에 가보니 일본 수비대의 행군 장소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참 어렵소. 단발령도, 단발역복(斷髮易服)이라 해서 일본이 자국의 면포를 수출하기 위해 꾀를 낸 거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얽히고설켜 있어요. 정책의 뿌리를 캐려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정책의 효과를 살피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겠어요?"

다소 느긋한 말투인 서석림의 목소리였다. 나이가 가장 많은 그의 말에 김광제는 음음, 밭은기침을 하다가 좀 전의 말을 이었다.

"물론 황제의 권력은 우리 백성에게나 통할 겁니다. 양계초의 '신민설'을 읽어보셨지요? 적자(適者)만이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생물처럼 나라도 진화한다고 합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먹어삼키는 서방의 민족제국주의는 그런 점에서 필연이라고 합니다. 허약한 민족은 지구에서 지워질 수밖에 없지요."

"글쎄요, 그것을 잘 들여다봐야 해요. 서방 군대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 먼저 상권부터 차지하겠다고 협상을 벌였어요. 일본도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면서 군인과 보급품을 나르려고 경부선 경의선을 놓았다지만, 사실은 일본 상인들에게 길을 터주려고 노선을 짠 거예요. 민족제국주의가 필연인가요? 그렇다면 그건 정치나 군대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필연일 겁니다."

서석림이 다시 대꾸를 했고, 김광제는 답답한 듯 장지문을 열고 "김권, 여기 차를 하나 더 내오게." 소리쳤다. 김이 주전자에 물을 받아 홍차를 넣고 화로에 올렸다. 계승은 조판을 하다가 옆방을 힐끔거렸다. 김이 문을 닫지 않았는지, 언제부터 회의실과 인쇄실 사이의 장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회의실에는 여덟 명이 둘러앉아 있는데, 가운데 놓인 세 개의 화로에서 간간히 연기가 피어올랐다. 좌장격인 서석림이 북쪽 벽에 앉아 있고, 양 옆으로 정규옥과 정재학이, 문쪽에는 이일우, 김광제, 서병오가 앉아 있었다. 장지문을 등진 이도 몇몇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장인 김광제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낙동강 수운을 활용해서 장사를 했던 한때의 상인들이었다. 낙동강 무역이 쇠퇴할 조짐이 번지자 대구에 와서 도시 자본가가 된 것이다. 인근의 논밭을 사들이는가 하면, 양잠업이나 은행업에 관여하고, 엄청난 부로 학교를 세웠다. 도시는 이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셈이었다. 조선의 명문가 선비들은 산수(山水)가 빼어난 곳에서 시(詩)를 읊거나 기울어지는 나라를 보고 비분강개하고 있었지만, 도시는 한갓 저자거리일 뿐이었다. 대구도 대부분의 지역이 장터였다. 사람들은 장터로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불어나는 일본 상인들과 자금으로 맞서는 것도 낙동강 무역상 출신인 이들뿐인 셈이었다.

"새로운 게 들어오면 낡은 것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구 읍성을 무너뜨린 게 일인들 짓이지만, 사실은 돈이 읍성을 부순 거예요. 읍성 때문에 돈이 흐르지 않았으니까."

우현서루를 세운 이일우의 말이 귀를 당겼다. 이일우는 낙동강 무역과 채금사업을 해서 수십만 평의 논밭을 소유한 이동진의 장남이었다.

"소남(이일우)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새것이 낡은 것을 파괴하지만 근거를 살펴야 합니다. 월남망국사를 보면 프랑스가 참혹하게 베트남을 짓밟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어떤 이들은 그 책을 읽고도 프랑스가 베트남을 개화시켰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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