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챙겨 보고 싶은 TV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전설을 노래하다'는 부제를 달고 오래도록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을 노래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이번 주에는 어쩌다 중간쯤에 보게 되었는데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뮤지컬 가수 선후배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해서 슬프도록 아름답게 불렀다. 30년이 지나간 노래임에도 원곡 그대로 하나 촌스럽지 않고 훌륭했다. 뮤지컬 발성으로 단련된 남성 듀오의 탄탄한 노래 실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노래에 실려 진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슬픔이란 단어 하나로 쉽게 설득되고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는 더욱이 아니지만, 가슴 밑바닥까지 잔잔하게 전해지는 먹먹함! 그래, 먹먹함이다.
'사월'이라는 단어로 떠오르는 여러 가지 기억 중에 우리가 끝내 잊을 수 없는 것, 아니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미처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들, 그 꽃다운 영혼들이 수장되는 침몰을 대책 없이 바라만 봐야 했던 알 수 없는 죄책감, 그렇다고 섣불리 감정을 앞세우거나 편을 갈라 지나치게 강요하지 않고 서로 함께 마음을 모아 잊지 말자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엘리엇(T. S. Eliot)이 '황무지'에서 노래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어렸을 때는 제대로 뜻도 모르고 아무 상황에나 끼워서 외치듯 놀려먹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는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한 역설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다. 엘리엇은 전후(戰後) 서구의 황폐한 정신적 상황을 '황무지'로 형상화하면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로 표현하여 시적 공감을 얻었다. 이제 기다리자. 우리의 아픈 기억도 발효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움의 바탕에 꽃이 피듯이 봄의 정령이라 부르는 꽃, 매화를 건너뛰고 봄날의 찻자리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선인들이 인격이나 품성, 학식 따위가 높고 빼어날 때 즐겨 사용하는 '고매하다'는 표현도 이렇듯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가 찻잔 속에 매화를 띄워 풍류 차를 즐기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안다.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서도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트리는 강인함과 맑고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기품으로 이어지는 선비정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올해는 평균기온이 낮고 비도 적게 내려 지난해보다 일주일 늦게 녹차 수확을 시작했다지만 곡우를 기점으로 '우전'이 곧 나올 것이다. 그토록 잔인한 '사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남녘의 바람을 타고 점점 다가오는 차향(茶香)에 벌써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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