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새들의 저녁<12>-엄창석

입력 2017-04-19 15:13:39

진눈깨비가 차츰 드세진다. 젖은 눈송이가 우산 위로 척척 달라붙는다. 시장은 대시가 언제 열렸느냐는 듯 황량한 공터로 변한다. 진눈깨비를 피해서 점포로 들어간 사람들이 처마 밑에 일렬로 죽 늘어서서 조금씩 짓물러지는 공터 흙바닥을 바라본다. 북후정이 있는 마시장 쪽에서 일본 헌병대원 하나가 붉은 말을 타고 다가온다. 발굽을 내딛을 때마다 약간씩 미끄러지면서 흙 위로 발자국이 찍힌다.

"비가 와서 오늘 사형집행 못하겠네."

"뭐, 구경꾼이 없으니까."

"좋은 날씨군."

옆에서 몇 사람이 빈정댄다. 금릉은 사형터가 되다시피 한 그녀의 집을 잠깐 떠올리다 처마를 빠져나온다. 원래는 남문 앞 관덕정 연병장이 사형터였는데 한두 해 전부터 큰시장 후미로 옮겼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터도 넓기 때문일 것이다. 일러 전쟁을 기점으로 모든 게 변했다. 중국 요동반도 있는 러시아 기지인 여순항이 함락되고 불과 3일 후에 대구에서 성대한 축하회가 열렸다. 전쟁이 완전히 끝난 지난봄에는 일인들이 수레에 올라 나팔을 불고 샤미센을 뜯으며 며칠 밤낮을 요란하게 휘젓고 다녔다. 대구 한인들도 꽤 섞여 있었다. 한 도시에 사는 이들의 국가가 전쟁을 이겼으니 축하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금릉은 말 등에 얹힌 헌병의 엉덩이를 떠올린다. 말은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흩날리는 진눈깨비 속에서 헌병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엉덩이에 반동을 넣으며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전쟁 전에는 상상도 못할 광경이었다. 혼자 말을 타고 가면 어김없이 돌이 날아들었으니까. 그랬던 것이 하루아침에 변했다. 러시아를 이겼다고 우리가 겁먹은 건 아니야. 곳곳에서 더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잖아. 염농산 아주머니가 한 말이었다. 그럼 왜 그래요? 전쟁이란 게 그래.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거야.

금릉은 한 곳에서 책장수를 발견한다. 처마 아래에 모인 사람들이 그녀에게 공간을 내준다. 책장수는 중국 상인이 아니고 서울 상인이다. 상인은『혈의 누』가 들어보지도 못한 소설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책을 권한다.

"월남패망사가 있어요. 요즘 이 책이 수호지보다 더 인기 있다오."

"그건 벌써 읽었어요."

금릉은 막무가내로 알은체를 한다. 유명하다면 염농산도 읽었을 것 같다. 서포에는 책 외에 돋보기, 안경, 붓, 호롱 따위의 잡화도 진열해놓았다. 금릉은 미국산 하얀 종이와 연필, 침향가루를 샀다. 종이와 연필은 아주머니에게 선물할 거고, 침향가루는 방에 두고 향기를 맡으려는 것이다.

시장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갔지만 서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진눈깨비도 그쳤다.

기루로 돌아오자 집이 텅 빈 것 같다. 여자들이 시장 구경을 갔거나 방에 틀어박혀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마당 가운데서 자라는 단풍나무 백일홍 자귀나무에 잎사귀가 죄다 떨어졌다. 노랗고 붉은 낙엽이 마당 중앙에서부터 방사형으로 날려가 마당을 물들이고 있었다. 일꾼인 정씨가 마당 저쪽에서 비질을 한다.

"그냥 두어요, 예쁜 걸요."

금릉이 소릴 지른다. 정씨가 허리를 펴다가 다시 비질을 하는 게 백일홍 가지 사이로 보인다. 낙엽을 그대로 두었다간 농산 아주머니한테 혼날 것이다. 금릉은 방으로 들어와서 구입한 용기를 열고 침향가루를 만져본다.

책은 못 샀지만 종이와 연필을 산 건 잘 한 거야. 아주머니가 좋아하시겠지. 염농산은 금방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기루로 오던 길에 수창사로 갔는데 거기에 농산 아주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부유한 상업인들의 사랑방인 수창사는 남문 앞길에서 기루로 들어오는 삼거리에 위치했다. 그녀가 수창사에 들른 것은 신문을 사기 위해서였다. 매일신보는 성 안에 있는 광문사에서 판매하지만, 거기까지 가기에는 길이 너무 질벅했다. 수창사에도 소량이지만 신문을 두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수창사 대청마루에 사람들이 가득히 앉아 있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치마 입은 여자가 눈에 띄었다. 염농산 뜻밖에도 아주머니였다. 가야금을 가르쳐준 석재선생도 있었다. 계산성당 길목에서 거지들에게 국밥을 나눠주던 서석림 노인은 언제 여기로 왔을까. 모두가 어마어마한 부자들이었다. 그래도, 들어가서 "신문 사러 왔어요." 말하려고 했지만 그만 돌아서 버렸다. 아래채 앞에 청년들이 잔뜩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릉은 아직도 또래 남자나 오빠뻘과 마주치는 게 쑥스러웠다. 어릴 때 함께 놀다가 기루로 들어왔으니까. 금릉은 까치발을 세우고 담장 안을 훔쳐보다가 청년들 틈에 있는 오돌매와 눈이 딱 마주쳤다. 곱사등이 오돌매였다.

뭔 일이래? 곱사등이가 말을 걸어오면 어떡해? 금릉은 질겁하고 장옷을 눈 밑까지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얼른 수창사를 벗어났다. 몇 발짝 못 가서 퍼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오늘 황량한 큰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어릴 때 큰시장에서 자랐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대청에 앉은 쪽은 죄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던 어른들이고, 아래채의 청년들은 요즘 큰시장에서 장사하는 이들이었다.

며칠 전 야상옥에서 긴밀히 논의를 하던 일인 상인들, 수창사에 모인 대구 상인들. 갑자기 금릉은 머릿속에 하얘진다. 곧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불안감에 젖으면서도 금릉은 손바닥에 침향가루를 붓는다. 검고 보드라운 가루에서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읍성도 무너뜨렸으니 더한 것도 하지 않을까? 금릉은 침향가루를 찍어 혀에 댄다. 단맛이 혀끝에 묻는다. 왠지 그때가 그립다. 금릉이 열세 살, 기루에서 처음 머리를 올리던 날이었다. 석재 선생이 곁에 있던 농산 아주머니에게 먹을 갈게 했다. 술상에도 그릇을 다 걷어내라고 한 뒤, 상 위에 침향가루를 뿌렸다. 금릉이라 했니? 발자취가 남지 않게 걸으면 상으로 너에게 글 한 폭을 써주마. 금릉은 치마를 걷어 허리춤에 안고 침향가루 위를 사뿐히 걸었다.

達成須作隴西看(달성수작농서간, 달성을 마땅히 농서로 보리라.)

그날 석재가 써 준 글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옛날 앵무라 불리는 전설적인 기생에게 어느 선비가 준 시를 석재가 가져온 거였다. 달성은 대구를 말하고, 농서는 앵무새가 살고 있는 곳을 뜻한다. 그러니까 금릉에게 지금의 앵무인 염농산의 뒤를 잇는 명기가 되어라는 소리였다. 곁에 앉은 농산 아주머니가 수줍게 웃었다.

기루가 없어지면 앵무는 어디로 날아가지?

금릉은 눈 밑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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