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저녁
제 3 장
호롱 불빛이 창호지에 부딪혀 잘게 바서졌다. 그녀는 손을 다른 쪽 팔꿈치에 대고서 창호지 위에 오리 그림자를 만든다. 호롱불이 너울대자 오리의 목이 휘청 구부러진다. 셋이 그림자놀이를 할 때가 언제였더라. 금릉은 떠나간 홍란과 자운영이 곁에 있는 듯 돌아본다. 홍란은 개를 만드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두 귀가 쫑긋 서고 혀를 내밀기도 했다. 자운영은 일본 인형과 젓가락을 사용해서 코끼리나 기린 같은 동물을 창호지에 올려놓았다. 취한 남자들이 비틀대며 대문을 빠져나가면 넓은 기와집은 이상스럽게 고요에 싸였다. 셋은 침실에서 그런 놀이를 했다. 그림자놀이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개나 오리, 코끼리가 대신해주니까. 술잔을 몰래 입술에만 축이던 홍란은 아기를 산에 묻고 돌아오지 않았다. 홍란은 이곳을 사뭇 떠났다. 기적(妓籍)이 없어져서 가능했지만 원하는 건 아니었다. 자운영은 병이 들어 나오지 못한다. 그들이 떠나고 혼자 남은 밤은 어색하다. 창호지에 오리 한 마리가 긴 목을 늘어뜨리다 사라진다.
금릉은 경대 옆에 세워둔 가야금을 당겨 무릎에 누인다. 오동나무 소리통을 쓰다듬다가 왼손으로 줄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튕긴다. 호롱 불빛으로 열두 가닥 현의 그림자가 몸통 위에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자가 흔들리며 영산회상 두어 마디가 풀려나온다. 소리는 그림자 같아, 금릉이 중얼거린다. 가야금 선율은 듣는 이의 귀가 아니라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자가 창호지에 스며들듯이. 그 소리는 경쾌한 휘모리라 해도 기쁘다거나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결이 현에서 피어난다. 슬프다와 안쓰럽다 사이에서 모호하게 떠도는, 자리 잡지 못하는 감정이 소리와 만나는 것이다. 그녀에게 가야금을 가르쳐 준 이는 석재였다. "현침 쪽 줄을 써라. 단단한 줄을 써야 감정이 자제된다." 현침은 몸통의 윗부분에서 줄을 장착하는 받침대이다. 받침대에 가까울수록 줄은 단단하다. 석재는 금릉에게 감정을 주체 못하고 흐느적대듯 줄을 튕기지 말라고 가르쳤다.
금릉은 진양조에서 중모리로, 휘모리로 점차 빠르게 현을 뜯는다. 울림판이 격하게 요동친다. 하지만 퍼져나간 소리는 정말 그림자처럼 문에 닿아 조금은 밖으로 새어나가고 나머지는 창호지에 머문다. 그래서 홍란이 생각나고 자운영이 생각난다. 그녀들이 사무쳤지만 보고 싶다든가 안타깝다든가 하는 마음은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이다. 창호지에 어리는 가야금 소리처럼 그냥 그런 것이다. 금릉은 다시 오른손가락을 거슬러 가야금을 뜯는다.
"애란아, 설루가 아직 안 왔니?"
언제 마당으로 나왔을까.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때 그녀들의 행수였던 앵무였다. 쉰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여전히 몸태가 가냘프고 목소리도 청아하다. 설루는 저녁나절에 일인 요릿집으로 불러갔다. 새벽에야 들어올지 알 수 없다.
"예, 걱정 마세요. 곧 올 거예요."
앵무는, 금릉이 기루에 들어온 지 다섯 해가 지났는데도 곧잘 옛 이름을 부른다. 문밖에서 '애란아' 부르는 아이 적 이름이 이날따라 반갑고도 왠지 무참하다. 언제 기루에 들어왔지? 그녀는 엄마와 달서교 아래서 빨래를 하고 물동이를 나르던 무렵을 기억한다. 십자기와 성당에 다니던 엄마가 그녀를 해성재로 데리고 간 날, 머루색 옷을 입은 수녀 앞에서 "얘, 물레질 솜씨가 여간 아니에요. 수녀님께 손 좀 보여드려. 얘 손가락을 거쳐 물레로 돌아오면 목화가 금방 실이 돼요." 하며 학교에 넣어줄 것을 부탁했다. 부끄럽게도 옷 짜는 게 공부하는 거와 관계있다고 믿었는지.
그런데 관계가 있었다. 해성재에서 배운 것이 셈과 음악이었으니까. 여러 가지 도형의 넓이를 계산했지. 십자기와 성모당의 넓이를 셈할 때 물레로 뽑은 실을 가져갔으니까. 어느 날은 읍성을 한 바퀴 돌며 성안의 넓이를 계산한 적도 있었다. 다섯 가닥 선에 음의 높낮이를 표기한 서양 악보에 대해서는 그녀만큼 친숙한 아이가 없었다. 베틀을 짜고 풀을 먹이고 하는 과정이 모두 선 위에서 이루지는 것이니까. 우리는 모든 게 두루뭉술하지만 서양은 모든 게 자로 잰 듯 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기와 성당만 불타지 않았으면 해성재를 계속 다니지 않았을까. 지진이 심하게 일어나던 날 성모당 안의 제대에서 촛대가 넘어졌고 불이 났다. 십자가 모양으로 기와를 얹은 아름다운 성모당이 잿더미가 되자, 오랫동안 해성재는 문을 닫은 것이다. 그러고는 교방으로 왔지. 엄마는 그때 왜 나를 교방에다 밀어 넣었을까.
그녀는 완자문을 열고 살며시 마당으로 나왔다. 트인입구(ㄷ) 모양의 집. 달빛 한 점 보이 않는다. 칠흑 속에 추녀의 비장이 마당으로 코를 내밀고 있다. 차차 어둠이 눈에 익자 하늘에 기와 선이 그어져 있는 게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그녀는 용마루 위의 어둠을 한참 응시한다. 그날 저곳을 넘어온 소리가 있었다. 쿵쿵쿵, 어디선가 가야금 소리자락이 건너오는 것이라 여겼던가. 우르릉, 우르릉. 1현의 저음부가 울고 있는 소리. 우르릉, 우르릉.
소리가 건너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런데도 밤이 되면 그 소리가 다시 용마루를 넘어올 것 같다. 술상 앞에서도, 잠결에서도, 측간에서도 곧 들릴 것 같은 예감에 몸을 떨었다. 분명한 것은 머지않아 또 들릴 거라는 점이었다. 이번에는 더 가까이서, 소리만 아니라 우레처럼 땅을 흔들며 건너오겠지. 그러면서도 그것이 가야금 저음부의 소리와 유사할 거라는 생각은 고치지 않는다.
그 소리가 나고 나흘 뒤 금릉은 일인 요릿집인 야상옥으로 갔다. 도로를 개설하고 성을 허무는 회의를 마친 뒤, 금릉을 부른 것이다. 그녀가 가야금을 안고 야상옥 방문을 열었을 때 이미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들이 앉아 있었다. 한인은 그녀가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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