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어느 날

입력 2017-04-07 04:55:02

벚꽃 피는 봄날의 감성으로…억울한 죽음 파헤쳐

아내 죽은 후 희망 잃은 보험사 과장

교통사고로 혼수상태 여성 사건 맡아

갑자기 나타난 영혼 따라 단서 찾아

김남길·천우희 주연 판타지 미스터리

4월, 5월은 극장가에 흥행몰이 작품이 눈에 크게 띄지 않는 비수기이다. 더군다나 탄핵 정국에 이어 세월호 인양과 대선 정국에 접어들며, 사람들의 관심은 정치, 사회 문제에 쏠려 있다. 그리고 현재 뜨겁게 달궈지는 대선 경쟁판은 각종 각본 없는 드라마로 흥미진진하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기록될 특별한 2017년 봄을 맞는 우리에게도 잠시 머리를 식혀줄 휴식 같은 영화가 필요하다.

영화보다도, 드라마보다도 더 흥미로운 현실의 사건들이 연일 펼쳐지고 있기에 영화에 대한 관심이 덜 해진 것도 있지만, 블록버스터들이 대거 대기하는 여름 시즌 전 이 시기는 한 템포 쉬어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벚꽃 시기에는 보통 예술영화나 잔잔한 로맨스물, 혹은 가족 드라마들이 떠들썩하지 않게 개봉해서 조용히 극장가를 지키는 양상이 펼쳐진다.

이번 주에 다룰 영화 '어느 날'도 지금 이 계절에 적절한 영화이다. 개성 강한 두 남녀의 로드무비. 그러나 이 영화의 특이점은 남녀의 로맨스가 아니라 '판타지 미스터리'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이윤기 감독은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여자의 무덤덤한 일상을 그린 데뷔작 '여자, 정혜'(2005)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넷팻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는 전도연, 하정우가 헤어진 연인으로 등장하는 '멋진 하루'(2008)에서 사건 중심의 영화 전개가 아닌, 캐릭터의 개성을 통해 일상성을 특별하게 담아내는,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펼쳐보였다. 일상에서 체험하는 미묘한 감정의 결을 살려내는 섬세한 연출법을 특징으로 하는 이윤기 감독은 '어느 날'에서 자신의 장기를 되살린다.

아내가 죽은 후 삶의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는 회사로 복귀한 후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천우희)의 사건을 맡게 된다. 강수는 사고 조사를 위해 병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스스로 미소라고 주장하는 한 여자를 만난다. 자꾸만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미소를 수상하게 여긴 강수는, 어느 날 그녀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남길, 천우희 두 청춘스타가 분한 캐릭터가 극을 끌어가는 이 영화에서 두 남녀는 각기 자기만의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강수는 오랫동안 병치레를 했던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고, 시각장애인인 미소는 어린 자신을 버린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무기력한 강수와 영혼이 되어 이제야 세상을 두 눈으로 보게 된 활기찬 미소는 아이러니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 제압해야 하는 보험회사 직원과 보험 청구인 관계이다. 영화는 돈으로 목숨 값을 흥정하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반영한다. 우리는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불쌍한 미소의 사연을 미소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미로 속에서 단서를 찾아나간다. 이와 더불어 강수와 아내와의 사연의 전말도 드러난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의 남은 이의 삶, 억울한 죽음과 이를 둘러싼 추악한 자본의 얼굴, 억울한 죽음이 헛된 죽음이 되지 않도록 남은 이들이 해야 할 일,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희망, 이것이 영화가 잔잔하게 사건을 전개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젊은이의 죽음'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이 세월호다. 2015년 4월에 일어난 그 사건 이후, 영화 속 죽음에 세월호를 떠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억울한 죽음이었고, 그 비극을 애도하지 못하게 만든 몹쓸 정권이었기에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통해하는 것이다. 최근 많은 한국영화가 젊은이의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은 충분한 집단적 애도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

영화에서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며 아픔을 직시하는 순간, 주인공들은 치유되며 희망을 향해갈 수 있게 된다. 자본의 편이 아니라 인간의 편에 선 강수의 정의로운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