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새論 새評] 보수의 위기

입력 2017-03-23 04:55:05

서울대(미학과 학사
서울대(미학과 학사'석사) 졸업.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전 중앙대 겸임교수

대통령 탄핵은 보수의 역사적 파탄

핵심 지지층 의식 자체 변하지 않아

"대선에 찍을 사람 없다" 푸념 늘어나

시대 흐름 거부 땐 보수는 진짜 위기

보수가 제 정신이라면 자유한국당은 폐업 신고를 하고, 바른정당이 새로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 보수를 개혁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시작된 보수의 위기는 대선 국면을 넘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구조적 위기로 보인다. 어쩌다 대한민국 보수가 이 모양이 됐을까?

사실 보수의 위기는 매우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보수인 김종필과의 연합을 통해 40.3%를 득표했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역시 보수주의자인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통해 48.9%를 얻었다.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비록 패했지만 보수의 손을 벌리지 않고 혼자 48.0%를 얻었다.

이는 사회가 고령화함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층이 장기적으로 계속 증가해 왔음을 보여준다. 즉 고령화가 곧바로 보수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진보와 보수가 40대에서 반반으로 나뉘었다. 지금은 그 연령대가 50대로 올라갔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연령대가 60대로 상승할지도 모르겠다.

서구와 달리 압축 성장을 해 온 한국 사회에서는 한 가정 안에 대개 세 개의 시간대가 공존한다. 할아버지 세대는 농경 사회, 아버지 세대는 산업 사회, 자식 세대는 정보화 사회에서 자라났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이 세대 간 갈등의 측면이 강하다.

한국의 보수는 농경 사회에서 자라나 6'25전쟁과 초기 산업화의 기억을 가진 이들을 지지층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전통적 보수층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이미 67년. 전쟁을 성인으로서 체험한 이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10년 후의 60대도 여전히 보수적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60대와는 성향이 많이 다를 것이다.

대통령 탄핵은 이 낡은 보수 이념의 역사적 파탄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보수는 이제 시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변화를 거부하고 있고, 개혁을 위해 뛰쳐나간 바른정당은 정치적 명분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보수층 사이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탄핵 사태에도 불구하고 핵심적 지지층의 의식 자체가 아직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박근혜 정권의 파국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스스로 변화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걸까? 간단하다. 그것은 보수 정당과 보수 언론의 장기간 선동으로 약간의 '변화'마저 위험한 '혁명'으로 여기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지지층이 변화를 거부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보니 정당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유한국당의 비박계 의원들을 생각해 보라. 탄핵에 찬성한 그들이 탄핵에 반대한 정당에 몸을 담는 코미디도 결국 지지층이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다.

자유한국당이 포괄하는 것은 탄핵 반대 태극기집회에 참여하거나 공감하는, 노년층 위주의 극렬 반공 세력뿐이다. 최대한으로 잡아도 이들의 수는 전체 유권자의 20% 선을 넘지 못한다. 이들의 바깥에는 이른바 '개혁적 보수'를 표방하는 바른정당이 존재하나, 아직 지리멸렬하여 과연 정당으로서 존속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하다.

보수층 중에서 '이번 대선엔 찍을 사람이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이 많다. 이게 일시적인 위기라면, 이번 대선만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위기이다. 대한민국 보수가 흘러간 과거에 발목이 잡혀 계속 변화를 거부한다면, 이번 대선은 물론이고, 다음 대선, 그다음 대선에서도 계속 찍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회가 발전하듯이 보수도 진화해야 한다. 보수의 힘은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유연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보수의 위기는 동시에 보수가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보수가 부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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