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정치인을 여러 번 만났다. 유학과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해 주변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당연히 국내 정치 관행(?)에 어두웠다. 2006년, 선거에서 공천을 받을 때 일이다. 당시 공천 특별 헌금이 필요하다는 당 간부의 귀띔에 내키지 않았지만 5천만원을 우선 입금시켰다. 그런데 며칠 뒤 깜짝 놀랐다. 은행 통장으로 5천만원이 고스란히 송금됐기 때문이다.
사연을 알아본 결과,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돈 공천 불가 방침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박 전 대통령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생각하며 빛바랜 오랜 은행통장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불통'(不通)과 '수첩공주' 등과 같은 여론의 비난과 비판이 난무할 때도 그랬다. 그에게 박 전 대통령 이미지는 세상을 뒤덮은 부정적인 소문에도 여전히 깨끗한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물론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과 탄핵 심판 과정에서 불거진 부정과 비리 의혹이 세상에 드러난 지금 그의 심정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리 역사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이들로 이뤄진 위정자들의 부패와 비리는 빠질 수 없는 단골 주제이다. 왕조가 바뀌고 시대가 흘러도 변함없다. 그만큼 뿌리가 깊고도 넓다. 고조선 시대 팔조금법(八條禁法)이 생긴 이래 처벌도 다양하고 많아졌다. 기록이 시작된 이래 부족했던 적이 없다. 되레 반대였다. 의도적이었지만 그래서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전한 우리 자료에는 유독 부패와 비리 이야기가 넘치고 남는다. '지방수령을 한 번 하면 3대(代)가 지낸다'거나 '관찰사 특히 경상도관찰사를 한 번 지내면 7대(代)가 먹고산다' '관리에게 진공(進供)하면 일이 잘 풀린다'는 등의 기록이 그렇다.
경계 글도 넘쳤다. 조선 8도(道)에서 가장 크고 넓은, 72고을의 경상도 감영이 그렇다. 물(?)도 좋은 만큼 집권 세력의 관리가 선호한 곳으로 비리도 당연했다. 오죽했으면 임금이 최고 관리인 관찰사가 머물던 대구감영(監營)에 조심하라는 글까지 내렸을까? '네가 받는 월급은 백성의 기름이고(爾俸爾祿民膏民脂), 아래로 백성을 괴롭히기는 쉬우나 위로 하늘을 속이기는 어렵네(下民易虐上天難欺)'라는 글이다.
이런 우리의 부패 역사로 1~16대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비리 척결을 약속했다. 물론 지켜지지 않았음을 국민들은 경험했다. 그래서 17대 이명박'18대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때 직접적인 부패 비리 근절 약속이 없어도 무신경했다. 약속해도 지켜지지 않아서다. 어김없이 17'18대 두 직전 대통령 재임 시절, 비리는 터졌고 뭇 측근들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지금도 그렇다. 박 전 대통령 관련 비리는 재판 중이다. 박 전 대통령도 숱한 의혹과 관련한 수사가 불가피하게 됐다. 앞선 정치인처럼 박 전 대통령을 깨끗한 정치인 상징으로 여긴 국민 심정은 참담하다.
역대 대통령의 수난사는 왜 못 막을까? 2012년 12월, 서울지사장 재직할 때 경기도 파주의 나남 출판사 조상호 대표와의 만남이 떠오른다. 처음 만난 필자에게 3권짜리 '소설 징비록, 왜란'을 주면서 독후감을 부탁했다. 필자의 독후감은 '물망역사'(勿忘歷史) 즉 '역사를 잊지 말자'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조 대표의 미소가 생각난다.
필자는 달리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작가가 소설 끝에 쓴, 징비록 저자 류성룡이 1607년 66세로 죽기 직전, 선조에게 올린 유소(遺疎)에서 '난리는 언제나 일어날 것이니, 먼 장래까지 대비하소서. 신하들을 깊이 관찰하시어 바른 정사를 세우소서. 백성을 고이 기르시고 어진 이를 등용하소서. 군정을 밝게 하시고 훌륭한 장수를 골라 쓰소서'라는 글이 가슴에 와 닿아서다.
그렇다. 대비는 지난 잘못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부패와 비리도 다르지 않다. 이번 대통령 탄핵과 파면에 이르기까지 저질러진 잘못과 비리도 잊지 않으면 충분히 처방이 될 것이다. 물망 최순실, 물망 탄핵. 이것만으로도 뒷사람 경계에 모자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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