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말의 고급화

입력 2017-02-28 04:55:05

산업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자신의 계층이 결정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교양이 있고 지식이 풍부하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리에 있더라도 경제력이 빈약하면 과거처럼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은행의 고객 등급표를 보면 프리미엄스타, 골드스타, 로열스타, VIP스타로 구분되고 있다. 프리미엄(premium)과 골드(gold), 로열(royal), VIP 이 네 단어를 같은 범주에서 서열화하여 높낮이를 정하는 것은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지만, 기준표를 보지 않고서는 자신이 속한 등급이 어느 정도 순위인지 알 수 없도록 하는 상술에 불과할 뿐이다.

서민을 위한다는 한 은행에서는 고객의 등급을 평범한 사람들이 언뜻 이해하기도 어려운 영어 단어로 honor, royal, prime, ace, gold로 정해 놓았다. 이 은행은 골드가 최하위 등급인 듯하다.

고객들은 은행에서 상당한 수준의 대우를 받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고급화된 단어로 등급을 부여받고 있다.

은행 창구에 가면 말단 입출금 담당자의 계급이 계장이고 그 뒤에는 보직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부지점장 몇 명이 있고, 어느 병원에는 의사 6명 중 5명이 원장이다.

노래자랑 행사의 등수에서는 1등이 최고가 아닌 지도 오래되었다. 1위에 금상이 있고 그 위에 대상이 있고 또 그 위에 그랑프리라고 상을 수여하는 행사도 있다. 상이 많을수록 좋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겠지만 1등 수상자는 상을 받고도 시무룩해질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중형차의 세부 등급에서는 고급형과 최고급형만 존재한다. 아예 최하 등급이 고급형에서 시작하니 어쩔 수 없이 고급형 차를 탈 수밖에 없다.

모임에 가면 월급쟁이나 공직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회장님이고 대표이고 사장님이다. 요즘은 산악회, 동기회, 향우회, 골프회 등 각종 모임의 회장이 많아서 현 회장, 전임 회장 등 구성원들 모두가 회장인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평범한 사람이면 고급형의 중형차를 타고 다녀야 하고, 은행에 가면 거의 혜택도 없는 단골 우대 골드 고객 대우를 받으며, 공항 면세점은 VIP 회원이고, 어디서나 사장님, 대표님, 회장님 등 극존칭으로 불리며, 한 끼 식사값에 가까운 디저트를 커피숍에서 먹는 것이 일상이다.

이러한 최고급화된 단어의 사용은 언어의 신뢰도를 떨어뜨려 불신 풍조를 불러오는 좋지 못한 사회 현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것도 알고 보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화려한 말로 포장해서 유권자들에게 남발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말의 고급화는 정직성을 떨어뜨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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