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틀이다 -김언의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사라지면서 변함없이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중략)/ 우리는 주변 세계와 내부 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김언, 전문)
언젠가 중학교 수학 교과서 한 페이지에서 오랫동안 머문 적이 있다. '평면 위의 한 지점에서 그 주위로 같은 거리의 선을 그은 것을 원이라고 한다. 그 같은 거리를 반지름이라 한다.' 평면, 점, 선, 같은 거리, 반지름…. 개별적인 사람을 점이라고 규정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기하학적 표현으로 읽었다. 평면 위의 한 지점을 향해 같은 거리를 돌고 있는 우리네 삶의 양상을 읽었다. 가까이로 다가가도, 조금씩 멀어져도 원은 심각하게 와해된다. 알고 보면 우리를 억누르는 틀인 셈이다. 다른 페이지에도 머물렀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그 규정도 엄청난 비극이다. 그중 하나의 각이 크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두 각의 크기는 줄어든다. 내각의 합이 180도를 넘거나 모자라면 이미 삼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만큼 무섭다. 삶은 슬픈 원이거나 냉정한 삼각형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 나름대로의 틀이 있고 그 틀 속에서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사라진다는 것. 틀이 부서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 따라서 삶은 어차피 틀 속에서 영위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데 틀이라는 것 자체가 구속이고 슬픔일 수 있다는 것. 원이나 삼각형이 아니어도 삶은 이어지는데, 아니 더욱 자유롭게 영위될 수 있는데 틀은 사회라는 억압의 힘으로, 상식이라는 논리로 우리를 지배한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360도가 되면 이미 사각형이다. 김언의 시는 이러한 기하학을 삶에 대입한다. 사실, 변하고 불완전한 것은 사람이지 기하학 자체는 아니다. 사람은 이미 점이지만 부피를 가진 존재이다. 점이면서 부피를 가진 양면성을 지녔다는 말이다. 존재의 모순. 원은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존재하는 점들의 집합이다. 하지만 사람은 서로에게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대칭을 이루지만 야누스적인 얼굴을 지닌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공유한다. 완결된 집이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고향에 있는 내 방은 오차 없이 찾아간다. 그 안에 점이 존재한다. 점은 수많은 다른 점들과 길항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견딘다. 잘 생각해보라.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아니한가? 규정하는 것은 기하학 자체이지 인간의 삶은 규정될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또 점을 찾아들어간다. '소설을 쓰자'고 부르짖으면서 결국 '소설을 쓰자'는 시를 쓰는 것이 김언의 마음이다. 기하학은 무섭다. 그는 그랬다.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을 모두 잊어버린 후에도 말할 것이 남아 있는 상태, 그 상태의 지속이 시를 쓰게 한다'고. 마감이라는 약속을 앞둔 지금의 나도 이미 틀 속에 사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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