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모두 기부했어도 '6연·6훈' 가문 정신은 지금도 지켜"
신라시대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해 7년 만에 장원 급제를 하는 등 유'불'선을 통섭한 빼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 경주 최씨 시조다.
고운의 후손이자 '13대 부자, 9대 만석꾼'으로 300여 년 부를 이어오면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부'권력'명성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온 경주 최 부잣집.
최염(83)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은 경주 최 부잣집의 마지막 부자, 최준의 손자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고운 최치원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발전시키고, 경주 최 부잣집의 정신을 후학들에게 전파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고운 선생과 최 부잣집의 정신, 그리고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마지막 최 부잣집의 일제강점기 재산운용 방식은.
▶할아버지(최준)한테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우리 집안은 무역회사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면서 파산했다.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하려면 논밭을 팔아야 하는데, 시간도 걸리고 일제에 탄로 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만석 재산을 갖고 군자금을 만드는 방법으로 1919년 백산무역㈜을 설립했다. 논밭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 자금을 수출입용으로 위장한 뒤 백산무역을 통해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는 식이었다. 하지만 매출이 생겨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고, 나중에는 차입에만 의존하니 버텨내기 어려웠다. 결국 1928년 파산했다.
-일제강점하에서 재산을 어떻게 유지했나.
▶백산무역의 파산으로 은행에서 보증을 선 재산을 처분하면 13대째 이어진 부자의 명성이 끊어질 판이었다. 하지만 일본 총독부는 재산을 모두 압류 처분하는 대신 상환유예 결정을 했다. 일제는 민중의 존경을 받던 최 부잣집을 파산시키면 민심이 크게 악화될 것을 우려해 이 같은 조치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마침 일제는 총칼을 통한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식민지 정책을 바꾼 시점으로, 당시 해군 대장이던 일본 총독은 우리 집안의 압류된 재산을 해제한 뒤 조선식산은행을 통해 신탁 관리하도록 했다. 일제는 최 부잣집이 돈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으면 상환유예 등의 조건을 통해 친일세력으로 전향시킬 수 있다는 계산을 한 셈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까지 친일행각에 동참하지 않았다. 식산은행이 당시 조사한 결과 우리 집안의 재산은 1만 석에 조금 못 미치는 9천500석 정도였다. 식산은행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뒷받침했던 핵심기관이다.
-이후 재산은 어떻게 됐나.
▶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 등을 반추해보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했고, 해방 후 대학 설립에 몰두했다.
할아버지가 주축이 된 대구대 설립에 해방 직후 친일에 대한 구제와 재산 유지를 위해 지주들이 기부를 많이 했다. 할아버지, 다액 기부자인 이사 3명, 감사 1명 등을 포함해 모두 5명이 1947년 대구대(영남대 전신)를 공동 설립했다. 대구대 설립에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내놓았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부산과 대구 등지로 피란온 서울지역 교수들이 경주에 대학을 설립해볼 것을 권유, 2년제 단과대인 계림학숙(영남이공대 전신)을 설립하면서 나머지 재산을 모두 투입했다. 계림학숙은 이후 9'28수복으로 교수들이 대다수 서울의 대학으로 다시 옮겨가면서 1955년에 대구대로 합병, 대구대 병설 대구여자초급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1967년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쳐져 오늘날의 영남대가 된 것이다.
-학창시절과 사회생활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대구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할아버지가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을 번갈아 맡은 상황이어서 학생 신분과 함께 이사장 비서 역할까지 해야 했다.
대학 졸업 뒤에는 감사원 전신인 심계원(審計院)에 특채돼 1년 동안 근무하기도 했다. 심계원은 국가 수입과 지출의 결산검사, 국가기관의 회계 감독 등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헌법기관이었다. 서울 심계원에 근무하면서 대구대 서울사무소 과장을 겸임했다. 이후 할아버지가 재단 이사장을 4차례 한 뒤 1960년대 초반 삼성 이병철 회장에게 학교 운영권을 넘겼다. 이 과정에서 재단 사무국장, 이사, 상무이사를 거쳤고, 1967년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쳐지면서 상무이사를 끝으로 대학법인에서 나왔다.
이후 친구와 함께 무역회사인 선경산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벌어 경기도 성남에 종합병원을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1980년대 초 민간이 의료취약지구에 병원을 설립하면 보건사회부가 병원 기자재 구입비를 싼 이자로 빌려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활용했다. 무역회사, 병원 운영에다 빌딩사업 등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댔지만, 할아버지 대(代)까지 이어진 부를 축적하지는 못했다.
-최 부잣집에서 이어온 정신은.
▶비록 조부를 끝으로 재산을 모두 기부했으나, 그 정신은 이어받고 있다.
우리 가문은 자신의 몸을 다스리는 6가지 생활지침(六然)과 살림살이 운용과 관련한 6가지 가훈(六訓)이 있다.
6연은 몸가짐을 초연하게 하고(자처초연: 自處超然), 다른 사람에게 온화하게 대하고(처인애연: 處人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하고(무사징연: 無事澄然), 일이 생겨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고(유사참연: 有事斬然), 뜻을 이뤘을 때 담담하게 행동하고(득의담연: 得意澹然), 실패하더라도 태연하게 행동하라(실의태연: 失意泰然)는 것이다.
6훈은 권력을 탐하지 말고(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상생의 이윤을 추구하고(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소통과 화합하고(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추구하고(흉년기에 땅을 사지 마라), 근검절약하고(며느리는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상부상조하라(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이가 없게 하라) 등이다.
-종친회 활동은 어떻게 해왔나.
▶약 25년가량 종친회 활동을 하면서 지난해까지 중앙종친회 회장을 3차례 역임한 뒤 현재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시조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는 일에 역점을 둬왔고, 경주 최 부잣집의 정신을 후학들에게 전파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최근 고운 선생의 계원필경 20권을 번역하고, 전국 4곳의 불교 관련 고운 선생의 비문을 번역해 총 1천600쪽에 달하는 문집 2권을 내 지난달 8일 출판기념회를 갖기도 했다.
-고운의 학문과 사상 계승에 집중하는 이유는.
▶고운 선생은 1천100여 년 전 12세에 당나라로 유학 가 28세에 국내로 돌아왔다. 중국에서 유학자로 명망을 얻었으며 불교와 도교에도 심취해 '유'불'선'을 통섭한 대(大)학자다. 중국에서는 명망이 높고 예우를 받은 반면 정작 국내에서는 그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분의 사상과 업적에 비해 국내에서 제대로 조명이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고운이 중국에서 더 조명받은 사례와 이유는.
▶중국은 10년 전 최치원기념관을 건립하고, 양주시는 아예 10월 15일을 '최치원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또 남경대학, 양주대학 등 곳곳에 최치원연구소가 있다.
게다가 역대 중국 국가주석도 고운 선생의 시 등을 자주 인용하면서 그분의 업적과 사상을 높게 평가해왔다.
1995년 당시 한중수교 기념으로 국빈 방문한 장쩌민 주석은 국회연설 첫 마디에 고운 선생의 계원필경 글을 인용했다. 또 시진핑 주석도 2013년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고운 선생의 시 '범해' 첫 구절을 인용,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고 돛을 다니, 장풍이 만 리를 통한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은 거리가 만 리이지만, 오랜 인연과 문화교류로 서로 통한다는 점을 빗댔다.
시 주석은 2014년 국빈 방한했을 때와 지난해 '방중의 해' 축하 메시지에서도 고운 선생의 시를 인용했다.
이런 반면 국내에서는 고운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낮다. 이는 일부 유학자들이 불교와 도교를 낮게 보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향후 종친회의 할 일은.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더 집중할 것이다. 국제학술대회나 공동 연구 등을 통해 고운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집중 조명하고 이를 널리 전파하는 데 힘을 쏟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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