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히스토리텔링] <6>한반도 일출의 시작, 호미곶

입력 2015-12-14 01:00:02

호랑이 형상 한반도 꼬리 부분 '국운 상승' 천하의 명당

상생을 의미하는 호미곶 앞바다의 상생의 손 포항시 제공
상생을 의미하는 호미곶 앞바다의 상생의 손 포항시 제공
호미곶한민족해맞이축전의 해맞이객들이 새해 일출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있다. 포항시 제공
호미곶한민족해맞이축전의 해맞이객들이 새해 일출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있다. 포항시 제공
호미곶광장에 들어선 새천년기념관
호미곶광장에 들어선 새천년기념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호미곶등대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호미곶등대

전라남도 해남이 남쪽 땅끝 마을이라면 호미곶은 한반도 동쪽 땅끝 마을이다. 지형상 호랑이 꼬리가 힘차게 뻗어 있는 형태를 띠고 있으며 호랑이는 꼬리로 무게중심을 잡듯이 호미곶이 한반도의 무게중심을 단단히 잡아 주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호미곶은 해맞이 고장이기도 하다.

◆호미곶의 유래

호미곶의 원래 지명은 장기곶이었다. 하지만 국립지리원은 경상북도지명위원회가 장기곶을 호미곶으로 변경해 달라는 신청을 받아들여 지난 2001년 12월 29일 지명을 변경하기로 의결했다. 한반도의 꼬리 부분인 포항 남구 대보면 '장기곶' 명칭이 '호미곶'(虎尾串)으로 공식 변경된 것이다.

'곶'은 바다 쪽으로 길게 내민 부리 모양의 육지를 뜻한다. 이에 따라 포항시도 2010년 조례를 통해 행정 명칭을 대보면에서 호미곶면으로 변경했다.

호미곶은 조선 철종 때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달배곶'(冬乙背串)으로 표기돼 있으나 일제가 1918년 장기갑으로 바꾸면서 토끼 꼬리로 낮춰 불렀다. 정부는 1995년 일본식 표기를 바꾼다는 취지에서 장기곶으로 변경했다.

한반도가 토끼 모습을 닮았다는 말은 일제가 퍼뜨렸다. 1905년 조선통감부가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라는 지리학자의 '산맥체계론'을 교과서에 실으면서 조선인을 나약한 민족으로 깎아내리려고 한반도 모양을 연약한 토끼에 비유했던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이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여암 신경준의 '백두대간'을 원용해 산맥체계론을 비판하고 연해주를 향해 발톱을 세운 채 포효하는 위풍당당한 호랑이로 한반도를 그렸다. 이른바 '맹호형국론'이다.

우리 국토를 호랑이에 비유한 이는 육당에 앞서 조선 명종조 풍수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처음이다.

그의 '산수비경'에 보면 한반도를 앞발을 치켜든 호랑이 형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중에 백두산은 코에 해당하며 운제산맥 동쪽 끝인 호미곶은 꼬리 부분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했다.

꼬리 부분을 국운이 상승하는 명당으로 친 것은 호랑이는 꼬리를 축으로 삼아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김정호도 영일만 지역을 일곱 차례나 답사한 끝에 대동여지도에 호미곶을 한반도 동쪽 끝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육당이 백두산 천지, 변산 낙조 등과 함께 조선십경으로 꼽았을 정도로 호미곶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호미곶의 재미있는 전설

▷마고 할멈이 운반한 교석초(矯石礁)

호미곶면 구만리에는 마고 할멈이 살고 있었다. 이 할멈은 종종 영덕 축산에 다녀오곤 했다. 영덕까지는 길이 멀고 또 험했다. 그래서 영일만에다 돌다리를 놓고자 했다. 구만리에서 축산까지의 바다는 평소에도 파도가 셀 뿐 아니라 물도 깊었다. 마고 할멈은 물살이 잔잔한 날을 택해 구만리 앞 바다에서 돌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치마폭에 큰 바위를 싸서 열심히 운반했으나 날이 새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다리를 놓으려고 운반한 바윗돌이 구만에서 축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바다 밑에 이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교석초라고 부른다.

▷강사리의 고인들

호미곶면 강사1리에는 높이 3m, 둘레 8m 정도의 바위가 있다. 강사3리 명월마을에도 이와 비슷한 바위가 있다.

옛날 금강산을 꾸미기 위해 하늘의 신들이 전국에 있는 바위들을 나르게 됐다.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은 하늘의 한 여장수가 바위를 하나는 머리에 이고, 또 하나는 치마에 싸서 금강산으로 운반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금강산에 바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전갈을 받고는 그 바위들을 이곳에다 그냥 버렸다고 한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구룡소

대동배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다 승천했다는 구룡소가 있다. 이 구룡소는 높이가 40~50m 정도이며, 둘레가 100여m의 움푹 팬 기암절벽이다. 용이 살았다는 소(沼)에는 맑은 바닷물이 드나들고 바닥의 평평한 곳에 여러 형상의 바위가 솟아나 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할 때 뚫어진 9개의 굴이 있으며 파도를 받아 물기둥을 이루는 장관과 한반도 모양의 연못 등 여러 가지 바위가 있어 학달비 8경의 한 곳으로 부른다.

◆호미곶 등대와 국립등대박물관

1907년 일본의 수산실업전문학교 실습선이 우리나라 연안의 해류, 어군의 이동 상황, 수심 등을 조사하기 위해 지금의 호미곶 앞바다를 지나다가 암초에 부딪혀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등대시설 공사를 하게 됐으며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 1908년 4월 11일에 착공, 11월 19일에 준공했으며 12월 20일에 점등했다.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근대식 등대다. 등대의 높이는 26.4m로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높으며, 둘레는 하부 24m, 상부 17m다. 광력(光力)은 1천 촉으로 16마일 해상 밖까지 등불이 보이고 2마일 해상 밖까지 들리는 안개신호기가 설치돼 있다.

호미곶등대는 굴뚝 모양의 8각형 입체물이며, 높이 26.4m로 외양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 등대는 다른 고층 건물과는 달리 건물 밑 부분부터 폭이 좁으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아 올려 지은 것이다. 등탑 내부는 6층인데 각 층의 천장에는 조선조 왕실의 상징인 이화 모양의 문장(紋章'가문이나 왕실을 표시하는 특별한 꽃 모양이나 동물 무늬)이 새겨져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1982년 5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우리나라 동해안 연안을 운항하는 선박과 포항항을 입출항하는 선박의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다.

등대 옆에는 국내 유일의 등대박물관이 있다.

영일군은 당시 장기갑 등대의 지방 기념물 지정을 계기로 등대와 관련한 각종 자료를 전시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포항지방해운항만청을 통해서 자료를 수집했다.

마침내 1985년 2월 7일, 대지 344㎡, 건축면적 112㎡ 규모로 문을 연 등대박물관은 항로표지 유물 및 관련 자료 320종, 4천266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585점을 항로표지의 역할과 기능, 역사, 생활 등으로 분류 전시하고 있다. 지금은 규모가 커져 대지 2만4천여㎡, 건축면적 5천여㎡로 커졌다.

주요 시설로는 항로표지 역사, 유물, 등대원 생활, 등대사료를 전시한 등대관과 아날로그 체험공간과 디지털 체험공간이 갖춰져 있다. 또 해운, 항만, 수산, 해양개발 및 해양안전과 관련된 해양관, 영일만'울릉도'독도 축소모형이 있는 수상전시관, 발동발전기, 등부표, Loran-C 송신장비 및 안테나 등이 있는 야외전시장, 모형 등대, 바다전망대 및 휴게실을 갖춘 테마공원이 있어 자녀들의 산교육장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운항체험관은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다.

주간과 야간, 악천후에서의 운행 시뮬레이션이 있는 조타실 모형으로 대형 영상화면에 항로의 진행사항을 보여주는 모니터를 통해 방향과 속도를 알려주면서 지정된 장소까지 무사히 배를 대는 것이다.

만약 제대로 운항하지 못하면 항로 이탈과 선박 파손 등이 발생, 게임이 끝나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선장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새천년기념관, 이육사 시비, 상생의 손

호미곶 광장에는 새천년 국가 지정 일출행사 개최를 기념하고 민족화합을 통한 통일조국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새천년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2009년 12월 28일 개관한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인데 관광객이 찾는 호미곶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곳에는 포항의 지리적 특성과 역사, 문화, 산업, 미래비전 등을 영상과 패널 등을 통해 자세히 접할 수 있는 전시실과 바다화석박물관, 한국수석포항박물관, 호미곶 일대 해안선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옥상전망대가 갖춰져 있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청포도로 유명한 이육사 시비(詩碑)가 대보리에 우뚝 서 있다.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포항 남구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다.

이육사는 이 시를 통해서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노래했다. 청포도라는 소재의 신선한 감각과 선명한 색채 영상들이 잘 어울려서 작품 전체에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준다. 특히 식민지 치하의 억압된 현실은 시인이 꿈꾸는 현실과 대립하면서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극복 의지가 담겨 있다.

풍요로운 고향에 대한 정겨운 정서가 듬뿍 담긴 '청포도'는 전설이 풍성하게 연결된 매체로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고달픈 몸으로 돌아올 손님에 대한 기다림의 정서를 담고 있다.

호미곶의 상징처럼 돼버린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축하하며 희망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1999년 6월 제작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인 그해 12월에 완공됐다.

상생의 손은 국가행사인 호미곶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이다. 육지에선 왼손, 바다에선 오른손인 상생의 손은 새천년을 맞아 모든 국민이 서로를 도우며 살자는 뜻에서 만든 조형물이다. 오른손(바다 쪽)은 높이 8.5m, 무게 18t이며 왼손(육지 쪽)은 높이 5.5m, 무게 13t으로 각각 청동 재질이다.

◆호미곶 한민족해맞이축전

호미곶 광장에서는 매년 새해 첫날 일출을 기념하는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내년이면 18회째를 맞는다. 매년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 다채로운 행사로 새해 소원을 빈다. 해맞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15만여 명이 몰려들 정도로 해맞이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새해 첫날에는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회원들이 밤새 정성과 사랑으로 끓인 떡국을 서로 나눠 먹는다. 새해의 희망을 나누는 호미곶 한민족해맞이축전 백미인 '1만 명 떡국 나눔' 행사는 장관이다. 특수제작된 대형 가마솥에서 장작으로 끓여내는 떡국은 추위를 잊게 할 정도로 별미다.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 도로가 4차로로 시원하게 확장돼 교통 불편도 사라졌다.

해맞이축전은 동해 바다에서 힘차게 떠오르는 첫 해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15만 명의 해맞이객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감동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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