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성노당'이란 유명한 책 대본소(貸本所)가 있었다. 지금의 공평네거리에 있었다. 네거리의 남쪽에서 오른편에 지금은 주유소가 있는데 당시에는 16헌병대가 있었다. 이 부대 바로 건너편이 성노당이었다. 그때는 대구 사람이면서 성노당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이 집을 수많은 한국의 '예비 링컨'들이 드나들었다.
옛 어른들은 독서를 권했다. 아니 권한 정도가 아니라 강요했다. 무릇 남자라면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공자도 책을 보고 또 보느라 책이 헤져 세 번이나 다시 책장을 꿰맸다고 한다. 그러나 책도 책 나름이지 우리나라는 해방되고도 한참 동안 소설이나 만화는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 독서란 오직 교과서뿐이었다. 초등학교까지는 조선시대처럼 아이들이 집에서 큰 소리로 책을 읽어야 했고 그쯤 돼야 공부 좀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전쟁 후 한동안은 교과서도 국제연합의 유네스코에서 기증받아 쓰는 판이니 만화나 소설은 구하기도 어려웠다. 에이브러햄 링컨 정도의 독서 열망감(熱望感)을 가진 정도가 되어야 금서(禁書)를 읽을 수 있었다. 링컨은 오두막살이 하는 궁벽한 시골 출신이어서 책을 살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런데도 워낙 책을 좋아해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책을 구해서 읽었다. 어느 날은 빌려 온 책이 비에 젖어 쓸 수 없게 되었다. 링컨은 책 빌려 준 집에 가서 솔직하게 사정을 말하고 책값 대신에 사흘 동안 품을 팔아주겠다고 했다. 감동한 주인은 젖은 책을 돌려주며 그 제의를 사양했다고 한다. 링컨은 1809년에 태어났으니 당시 미국은 우리네 해방 때보다도 더 가난했고 링컨네 집의 형편은 더 말할 것도 없던 때였다. 이런 환경에서도 열심히 책을 읽은 덕에 링컨은 변호사도 되고 미국의 16대 대통령까지 된다.
대구에 '성노당'이란 유명한 책 대본소(貸本所)가 있었다. 지금의 공평네거리에 있었다. 네거리의 남쪽에서 오른편에 지금은 주유소가 있는데 당시에는 16헌병대가 있었다. 이 부대 바로 건너편이 성노당이었다. 그때는 대구 사람이면서 성노당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이 집을 수많은 한국의 '예비 링컨'들이 드나들었다.
16헌병대에는 모자 삐딱하게 쓴 군인이나 경례를 잘하지 못하는 병사에서부터 탈영병, 도둑, 폭행범까지 다양한 농땡이 군인들이 잡혀왔다. 그중에 훈계 방면이 되어 풀려나는 운 좋은 사람도 있었고, 죄가 무거운 사람은 그곳에서 영창살이를 하였다. 어떤 때는 학교 가는 낮인데도 두들겨 맞는지 고문당하는지 비명이 들려 어린 우리가 자주 놀라던 곳이다.
성노당 뒤쪽 커다란 적산가옥에도 육군 특무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부대와 담장을 같이하고 있던 우리 집에서도 자주 얻어터지고 주리가 틀리는 비명이 들렸다. 여기는 간첩도 잡혀 왔는지 헌병대 소리보다 훨씬 처량하고 비극적인 소리가 들렸다. 헌병대, 특무대가 왜 우리 동네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쟁 중에는 중앙국민학교에 미군부대가 있었고 육군본부가 한국은행 자리에 있었다. 보충대가 동인파출소 뒤에 있었으니 이런 으스스한 부대가 있었지 않나 싶다.
군인 아저씨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안 우리는 책을 빌리러 갔다. 어른들이 소설이나 만화를 못 읽게 하니 될 수 있으면 성노당에 앉아서 속독해야 했는데 독서삼매(讀書三昧)에 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했다. 사실 책을 읽으면 그 글귀에 홀딱 빠져야 하는데 이러다가 귀가 시간이 늦으면 어머니가 찾으러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 소설은 할 수 없이 책을 빌려 오게 된다. 집에 와서는 책을 숨겨야 했고, 학교에 가서는 수업 시간에 교과서 위에 포개서 소설을 읽어야 했다. 정말 불온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천로역정(天路歷程)의 가시밭길 같았다. 책을 읽으면 행복하다가도 울음이 나오고 울분에 치받쳐 주먹을 쥐기도 한다. 이런 모든 감정이 어우러져 어린 우리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고 성숙시켰다.
소설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치도곤을 맞은 경우도 많았다. 잘못했다고 얻어맞거나 꾸중을 듣는 것쯤이야 '독서인'을 자처하는 우리로서는 밥 먹고 숭늉 마시는 일 정도밖에 안 되지만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일어나는 경우는 정말 하늘이 노랬다. 화가 난 아버지가 책을 몽땅 불살라 버리거나 찢어 버렸을 때 밀려오는 절망감, 두려움. 그 감정은 아직도 공포다. 옛날 경상도 아버지들은 왜 그랬을까? 박목월 선생의 어른이 서울 유학을 가겠다는 아들을 밤새 멍석에 꿇어 앉혀 두었다가 새벽 '모량역'에서 서울 가는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하려고 할 때서야 "옜다, 여기 있다"면서 동전 꾸러미를 던졌다고 한다. 기차는 떠나는데 어린 목월은 초조한 마음으로 흩어진 동전을 모았지만, 기차는 떠나버렸다. 미처 동전을 다 추스르지 못한 목월의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이 멍석에 떨어졌는데 그 크기가 동전만 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목월은 대구의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계성고등학교 입장에서야 다행스러운 일화일지 모르지만 목월의 가슴에는 평생 남는 상처가 생겼다.
성노당이 거창하다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대본소였다. 단층으로 된 건물인데 가로보다는 세로가 긴 집이었다. 책방은 전면을 빼고는 삼면이 전부 책으로 가득했는데 층층이 긴 철사줄을 걸어놓고 책은 거기에 오징어 말리는 모양새로 널려 있었다. 이런 책은 대개 만화였다. 큰 형들이나 삼촌들이 보는 소설은 높은 책장에 꽂혀 있었다. 반세기도 훨씬 전의 일이라 생각이 가물거린다. 당시 만화는 동양화 식으로 그린 김종래와 박기당 선생의 것과 단순 그림으로 그린 김경언, 박기정 선생의 작품이 최고 인기를 구가했다. 소설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 '톰 소여의 모험' '15소년 표류기' '소공자' '소공녀' '괴도 루팡'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암굴 왕' 등이 많이 읽혔다. 15금급으로는 방인근 선생이 최고 인기 작가였는데 '12열차에서 내린 여인' '벌레 먹은 장미' 등이 유명했다.
젊은 시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도 성노당에 갔을 것이다. 그 덕에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요즘은 책도 값이 싸고 도서관도 흔하다. 집에서 소설을 읽으면 오히려 칭찬받는다. 만화가도 인기 직업이다. 좋은 세상이다. 성노당은 대구 인물 창조에 일조한 곳이었다.
댓글 많은 뉴스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전광훈 "대선 출마하겠다"…서울 도심 곳곳은 '윤 어게인'
이재명, 민주당 충청 경선서 88.15%로 압승…김동연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