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고욤

입력 2014-11-19 07:55:04

▲김여하
▲김여하

먹을거리로 인해서 고생을 해보지 않은 이는 그로 인하여 받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어차피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니까.

고욤이 익어간다.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아기 엄마 젖꼭지만 한 열매들이 캔버스에 붓으로 그려놓은 듯 점점이 매달려 있다. 꽃이나 열매가 감을 닮았다고 하여서 작은 감이라고 불리며 감나무의 대목으로도 쓰였다. 고욤나무는 암수가 다른데 고욤을 먹으면 고혈압 치료와 중풍 환자에게 좋으며 얼굴에 윤기가 난다고 한다.

초겨울이면 작은고모는 해마다 고욤을 익히고 휘휘 저어서 이고 큰집에 오셨다. 할머니 드리려고 단지에 담아 이십 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서 오셨다.

집 가까이 있는 큰집에 놀러 가면 치매기가 있는 팔순의 할머니가 아랫목에 앉아서 고욤을 잡숫고 계셨다. 손자가 와도 단 한 번도 고욤을 먹어보라 하신 적이 없다. 어떨 때는 홍시를 드셨는데 그때는 감 껍질을 주시기도 했다. 그나마 손녀들은 어림도 없었다. 눈치 없는 누나가 달라 했다가 곰방대로 혹이 날만큼 얻어맞기만 했다.

감나무는 씨를 심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 그래서 고욤나무에 접을 붙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밭에 가서 감나무 접붙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몇 그루에는 감나무 접을 붙이고 몇 그루는 고욤을 따먹으라고 그냥 남겨 두셨다.

고욤나무에 V자 홈을 파고 쐐기 모양의 감나무를 꽂고는 헝겊으로 동여매어 주는 것이었다. 다음해 봄이 되면 보드랍고 노란 참새 주둥이 새싹이 돋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씨앗이 커서 별로 먹을 것이 없었지만, 서리 내린 후 까만 열매를 단지에 넣고 익혔다. 겨울밤에 식구들이 모여 앉아 퍼먹으면 달고 떫으며 시원했다.

아버지 산소 앞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 고용나무에 접을 붙이던 추억의 감나무가 근위병처럼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부모님의 산소도, 감나무도 고욤나무도 모두 없어졌다. 그곳에 고속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이장한 것이다.

마을 주민센터 앞에 고욤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누구 하나 따먹는 이가 없다. 그래서 봄까지 열려 있다가 저절로 떨어지고 새봄이면 또 고욤이 열린다.

서울 사람들은 고욤나무를 모르는 것일까? 그래서일까 시장에서 파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서리가 내리면 거의 모든 열매들이 익는다. 고욤도 단맛이 오를 것이다. 까맣게 익어야 고욤도 달고 맛있어진다. 그것을 단지에 넣고 몇 달간 익혀야 된다. 고욤 맛은 입에 뱅뱅 도는데 어디 가서 그것을 사서 아이들이랑 눈 내리는 겨울밤에 먹어 볼까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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