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물결 위의 젖무덤

입력 2013-10-31 13:54:29

세떼들이 날개 접고 쉬는 섬, 조도의 감흥 못잊어

여인의 젖무덤이 섬으로 보일 때가 있다. 연예인 행사에 붉은 카펫을 밟고 줄지어 나오는 여배우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실크 천으로 젖꼭지는 살짝 가리긴 했는데 가린 둥 만 둥 보일 것은 다 보인다. 그게 어머니의 젖이라면 달려들어 한 번 빨아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바닷가나 섬을 여행하면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섬들이 젖무덤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진도 팽목항에서 배를 타고 조도로 건너갔다. 한옥 펜션을 잡아두고 저녁밥을 짓기엔 이른 시간이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조도 지구는 다도해 해상공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상조도, 하조도, 대마도, 소마도, 관매도 등 40여 개의 섬들이 모여 있다. 섬의 가장 높은 산이래야 해발 200m 내외다. 이곳 주변 섬들은 새떼가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조도(鳥島)라고 이름 붙였다.

상조도의 도리산 전망대에 오르면 아름다운 새떼 섬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면 위에 약한 해무가 끼는 날이면 섬들은 옅은 안개 속에 보일락말락한 모습을 감추듯 드러내고 있다. 섬들은 바로 붉은 카펫 위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어가는 여배우들의 젖무덤처럼 보인다. 젖가슴 사이를 덮고 있는 흰색에 가까운 회색 베일은 무슨 비밀의 문을 덮고 있는 휘장처럼 바람이 일렁거릴 때마다 호기심의 바다가 춤을 춘다.

조도의 섬들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내 옆의 어느 도반은 "저건 하롱베이의 축소판이야"라고 감탄을 하자 모두들 "정말 그러네"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세계적인 부호 워런 버핏은 "브릿지 게임에 열중할 때 미인의 누드가 내 앞을 지나간다 해도 내 주목을 끌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물결 골짜기 사이사이 미녀들의 젖무덤 곁에 앉았으니 하롱베이가 기억 속으로 떠오를 리가 없다.

전망대에 오른 나는 실로 오랜만에 리비도(Libido)라는 갖고 놀기에 딱 좋은 낱말을 기억해냈다. 봉긋 솟은 섬들을 본 감흥이 여배우들의 젖무덤으로 연상되다가 드디어 성본능 내지 성충동이라고 번역되는 리비도에 도달했으니 조도 앞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준 선물치곤 너무 커서 버겁다.

리비도가 단순한 성 욕망 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춘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생성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란 정신분석학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비도가 충족되기를 바라지만 충족되지 않을 땐 불안으로 변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리비도가 승화되면 정신활동의 에너지로 바뀐다니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리비도도 긍정적으로 계속 충전되기를 희망한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면 글 쓰는 것을 비롯해서 모든 창조하는 것으로부터 얻는 감동이 아름다운 치유의 바다로 나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조도 앞 바다의 섬들이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나의 머릿속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가. 영국의 해군장교이자 여행가인 바실 홀은 1816년 라이러 호를 타고 중국에 들렀다가 귀국길에 이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조도 앞 바다에 떠있는 섬들의 모습과 풍광이 너무 좋아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격찬했다.

그는 이곳에서 열흘을 머물며 섬 하나하나를 둘러보았다. 바실 홀은 도리산 돈대봉에 올라 새떼의 군무를 보는 순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너무 아까운 풍경들이어서 섬 하나하나에 자신의 부하 성명으로 섬 이름을 지었다.

하조도는 앰허스트 섬, 상조도는 몬트럴 섬, 외병도는 샴록 섬, 내병도는 지스톨 섬으로 명명했다. 이런 이름들은 그가 쓴 '10일 간의 조선 항해기'란 책 속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벽안의 해군 장교도 조도 앞 바다에 펼쳐져 있는 새떼 섬들을 단순한 섬으로 보았을까. 모르긴 하지만 그도 나처럼 실크 베일에 가려져 있는 섬 하나하나를 애무하고 싶은 젖가슴으로 보지 않았을까.

조도 군도의 중심인 상종도 섬등포는 옛날부터 꽃게 파시가 열린 곳이다. 지금도 군도 사이로 한류가 흘러 꽃게가 많이 잡혀 꽃게장이 열린다. 그리고 돈대봉은 일출과 일몰을 제자리에서 볼 수 있고 밤에는 은하 속의 별똥별이 흘러가는 별들의 고향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새떼 섬들이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버려져 있다. 조도 군도를 한 바퀴 돌아오는 관광 상품은 전혀 없다. 기껏 하루 몇 차례 진도에서 조도를 거쳐 관매도를 돌아가는 정기 여객선과 쉬미항에서 가사오군도를 돌아오는 유람선이 통통거리며 물이랑을 이룰 뿐이다. 새떼들이 비상하는 날갯짓을 보고 싶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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