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병원 들어오려 6·25때 미군 자원한 '대구 사랑'
2013년 9월 25일 계명대 동산의료원 내 은혜정원(대구경북에서 순교한 기독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가 묻혀있는 외국인 묘지)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45년간 헌신했던 의사이자 선교사인 하워드 마펫(Dr. Howard F. Moffett ; 한국 이름 마포화열)과 부인 마가렛 마펫(Margaret D. Moffett)의 유해 안장식이 열린 것.
부인 마가렛 마펫은 2010년 1월 20일 향년 94세로, 하워드 마펫 원장은 2013년 6월 2일 향년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안장식에 참석한 마펫 원장의 막내아들 샘 마펫(Sam Moffett)은 "마지막 유언이 '대구는 나의 집'이라고 했을 만큼 떠나는 날까지 동산의료원과 한국을 그리워했다"고 전했다. 그 유언에 따라 한국 땅에 묻힌 것이다. 마펫 원장의 생애는 대구경북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및 '동산의료원 100년사' 주필을 역임한 이재원 씨의 글을 일부 인용'정리했다.
◆2세대 미국인 선교사, 하워드 마펫
하워드 마펫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파송한 의료선교사였다. 31세 청년이던 1948년 12월 동산병원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은 뒤 77세인 1994년 동산의료원을 떠날 때까지 약 46년간 근무했던 마펫 원장.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동산병원에 와서 60병상의 작은 병원을 1천 병상의 대형의료원으로 성장시킨 마펫의 일생은 오롯이 동산병원과 함께 했다.
국적은 미국이지만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냈다. 이 때문에 마펫은 늘 고향을 평양이라고 했다. 2세대 미국 선교사인 셈이다. 그의 아버지는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 한국 이름 마포삼열)이다.
사무엘 마펫은 처음 평양에 들어갈 때 한 시민이 "미국 귀신 물러가라"고 던진 돌에 맞아 쓰러졌던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고, 이후 평양을 중심으로 1천여 개 교회에서 10만여 교인을 길러내고, 300여 곳의 소학교와 숭덕'숭실'숭의 등 수많은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한국인 신학교를 설립해 한국인 목사가 선교의 주체가 되는 시대를 열었다.
하워드 마펫은 1917년 8월 16일 평남 평양시 신양리에서 사무엘 마펫의 5남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초'중'고 과정을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마쳤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미국 일리노이주로 건너가 1935~1939년 휘튼대에서 공부한 뒤 시카고 노스웨스턴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즈에 있는 채리티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받았다.
◆미국서 의학 공부한 뒤 다시 한국으로
마펫은 의대 재학 중이던 1941년에 대학 비서로 근무하던 마가렛 매켄지(Margaret D. Mackenzie)와 결혼했다. 마가렛의 집안 사람 중에는 선교사가 여러 명 있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선교사업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가렛은 1940~1943년 노스웨스턴대 의과대학 비서로 근무 중에 한국 선교사의 아들인 하워드 마펫을 만났다.
인턴을 마친 마펫은 미 해군에 입대해 3년간(1944~1947) 서남태평양 해군기지에서 의무장교로 복무했다. 제대 후 1947년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았지만 곧바로 한국에 올 수 없어서 임시로 중국 난징(南京)대학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일 년도 채 안돼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마펫은 추방됐다. 대구 도착까지의 과정에 대해 마펫 원장은 "아내와 두 어린 아들은 여객칸에 태웠지만 나는 짐을 안전하게 운반하려고 난방시설이 없는 화물칸에 탔다. 군용 비상식량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군용 침낭으로 추위를 견디며, 사흘 만에 마침내 대구에 왔다"고 회고했다.
당시 동산병원장은 로이 스미스(Roy K. Smith) 박사였다. 일본이 항복하고 미군정 장관이 도착한 뒤 1948년 11월 26일 자로 임시원장을 맡고 있던 문영복 장로로부터 원장직을 인계받은 상태였다. 마펫이 도착 후 6개월 만에 스미스 박사가 은퇴하고 귀국하자 마펫이 원장 직무를 맡았다. 당시 부원장은 미국 피츠버그의대를 졸업한 황용운 내과 과장이었다.
◆6'25 발발 후 군에 재입대해서 대구로
일제에 빼앗겼던 병원을 되찾은 뒤 제대로 인력과 장비를 갖추기도 전에 6'25전쟁이 터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 마펫 원장은 '나의 대구 40년 회고'를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원장에 취임한 지 꼭 1년 만인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선교사들은 대천해수욕장에서 연회(Annual meeting)를 하고 있었다. 도중에 서울의 미국 대사가 내려와 "서울이 함락 중에 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말했다. 한반도 전부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갈 듯이 보였다.'
당시 한국에 있던 미국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피란가야 했다. 이들을 이송할 해군 수송선은 부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펫은 급박하게 당시 부원장이던 황용운 박사에게 업무 인계를 했다. 수송선에 오르자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미군을 파병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마펫은 다시 대구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마펫은 간절하게 대구로 돌아가고 싶었다. 3주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는 묘책을 찾아냈다. 군에 다시 입대해 미군과 함께 대구로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2차대전 중 해군 의무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마펫은 미공군 파견 해군 군의관으로 수속을 밟고 일주일 만에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던 위험한 시기에 굳이 군에 다시 입대해서까지 대구로 돌아오려던 이유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병원 지키기 위해 모든 방법 동원
'당시 우리 병원 사택을 사용하던 무쵸(Muccio) 대사에게 병원의 일부 한국 사람들을 일본으로 피란시켜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다시 병원의 직원과 가족, 환자, 일부 기자재를 부산으로 옮겨갈 4대의 기차 사용교섭을 미군 당국과 했다. 다행이 이 일이 성사돼 우리는 부산의 한 절에다 임시 병원을 설치하고 3개월 동안 운영할 수 있었다.'
대구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상당수 경찰관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이들을 치료할 병원이 마땅치 않았다. 1950년 9월 26일 내무장관은 동산병원을 경찰병원으로 위촉했다. 병원의 모든 직원은 경찰관으로 임명됐고, 과장급 이상은 경감 계급을 받았다. 옛 진찰실 건물은 경찰 전용병동으로 지정돼 수많은 경찰관을 치료하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북한군이 북으로 물러가자 마펫 원장과 가족들은 다시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원 시설도 다행히 그대로였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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