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의 무게, 비의 칙칙함 의식 않아야 멋진 풍광 볼 수 있어
경북 봉화의 석포역~승부역 간 삼십 리 눈길은 환상적인 코스다. 제 작년에 다녀오고 난 뒤 그 감흥이 너무 커 "다시 가 봐야지"하고 별러 왔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대구는 매년 눈 같은 눈이 내리지 않는 아주 삭막한 곳이다. '강원과 서해 쪽에 폭설이 내리고 있다'고 텔레비전에서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도 이곳 하늘은 항상 말갛다.
아침 뉴스에 "저녁부터 전국에 눈 아니면 비가 온다"고 했다. 마침 일생스쿠버 모임의 신년회 자리에서 석포~승부 간 눈길 걷기 이야기가 나왔다. 쇠뿔은 단김에 빼듯 내일 새벽에 떠날 회원들에게 미리 회비부터 걷고 임무를 배당했다. 아침은 찰밥, 점심은 떡국, 저녁은 라면, 안주는 돼지족발 두 접시와 소고기 갈비살 구이, 그리고 반찬은 각자 한 가지씩으로 정하고 나니 만사형통이었다.
이 길에는 식당이나 가게가 없고 식수조차 귀하다. 새벽열차를 기다리는 여섯 도반들의 배낭 무게가 만만찮다. 차림을 보니 폭설에는 대비한 듯한데 장대비가 내린다면 속수무책으로 맞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기다리는 눈은 내리지 않고 빗방울이 차창에 빗금을 긋고 있었다. 옷을 벗은 나무들도 날씨가 너무 푸근하여 벌써 봄기운을 느끼는지 가지마다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눈 오기는 글렀나 보네.
석포역에 내리니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다운파카 위에 비옷을 껴입고 덧모자를 눌러쓰고 걷는다. 석포제련소에서 뿜어내는 매캐한 냄새가 기분을 잡치게 만든다. 빠른 걸음으로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 코끝이 상쾌하다. 오른쪽 골짜기 안의 높은 산에는 폭설이 내렸는지 수묵 산수가 하얗게 걸려있다.
산행을 할 때 무겁게 느껴지는 짐도 한 시간쯤 걷고 나면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숙달, 타성, 망각의 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다만 느끼지 못할 뿐이다. 이럴 땐 환경이 주는 압박감을 잊고 무상무념 상태로 그저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짐의 무거움과 내리는 비의 칙칙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처님 마음이 되어야 주변의 풍광이 보이고 살아있음에 대한 환희에 젖게 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한 번 젖은 돌은 두 번 젖지 않듯이 우리는 비오는 길 옆에 소박한 술상을 펴고 젖은 잔디를 깔고 앉았다. 족발 한 접시에 금강산 유람 다녀온 도반이 꺼낸 들쭉술의 궁합이 어찌나 잘 맞는지 여분의 족발까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날아가고 말았다.
점심은 지난 번에 왔을 때 봐 두었던 석포면 소천리 승부길 638 김복순(당시 63세) 씨 집 앞 비닐하우스에서 먹기로 하고 계속 걸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그때 그녀에게 사다 주기로 약속했던 목 긴 장화를 갖고 오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외로움에 찌들어 건강이 좋지 않은 외딴집 노파였다.
"할머니 계세요" 하고 문을 열었더니 낯선 할아버지가 "전에 살던 할매는 죽었소" 한다. 우리가 다녀가고 5개월 뒤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화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못내 죄밑이 되어 "허, 그것 참"을 연발하며 후회를 떡국에 말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이렇게 단순하다. 문틈으로 빠져나가는 담배연기처럼 생명은 기다릴 것도, 그리워할 것도, 사랑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눈보라 속에 눈길을 걷고 싶었던 우리의 소망은 때 아닌 빗방울 소나타 연주로 무참히 깨어지고, 장화를 갖고 갈 때까지 기다리리라 믿었던 가냘픈 목숨도 이미 사라져 그것이 남은 생애의 작은 회한으로 남는다.
펑펑 눈이 내리면 술 한 잔 앞에 놓고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도반들 앞에서 낭송하려 했는데 온종일 추적대는 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적어온 쪽지를 찢어버렸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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