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썩어가는 세상을 풍자한 시(詩) 한 편을 기억한다.
다섯 부류의 도둑을 풍자한 담시(譚詩) '오적'(五賊)이다. 그 시를 쓰고 난 뒤 감옥에 잡혀갔던 시인 김지하는 당시 '다섯 도적'으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군 장성, 장'차관을 꼽았었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6명의 대통령이 바뀐 오늘 이 시각, 두 가지 의문과 믿음을 갖게 된다. 국민소득이 100배 이상 오르고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대회가 열릴 만큼 국격(國格)과 국부(國富)가 높아진 나라에 설마 40년 전 도둑떼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라는 의문과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 의문은 역시나였고 믿음은 빗나갔다. 그날의 시를 되읽어보자.
시(詩) '오적'은 재벌을 이렇게 풍자한다.
'첫째 도둑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 해 입고, 돈으로 모자 해 쓰고, 돈으로 구두 해 신고, 돈으로 장갑 해 끼고, 금시계 금반지 금팔찌 금단추 금박클 금이빨, 아그작 아그작 나온다. … 저 재벌 재조 좀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 치고 간장 치고 겨자 치고 고추장 치고 조미료까지 톡톡 쳐서 은행 돈, 외국서 빚낸 돈, 온갖 특혜 좋은 이권 모조리 꿀꺽…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 할아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되놈 술수 뺨치겠다…'/
'또 한 놈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표 도둑질… 우매(愚昧) 국민 그리 알고 저리 멀찍 비켜서라. 냄새난다. 퉤!…'/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 공무원. 산같이 높은 책상, 우뚝 높이 걸터앉아. 공(功)은 쥐뿔도 없는 놈이 한 손으로는 노 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 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 돼, 안 될 것도 문제없어. 높은 놈에겐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공금은 잘라먹고 뇌물은 청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 구름아 물어보자.'/
'넷째 놈이 나온다. 장성(將星)놈이 나온다. 키 크기 팔대장성, 제 밑에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졸병먹일 소'돼지는 털 한 개씩 나눠주고 살코기는 혼자 몽창 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 잡아 패서 영창에 집어넣고…'/
풍자 담시라지만 '오적'에 등장한 자들의 심사가 뒤틀릴 만하다. 서슬 퍼런 그 시절 감옥만 가고 끝난 게 천우신조다. 40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가 이 나라의 '신(新)오적' 을 쓴다면 일부의 얘기긴 하지만 재벌, 고급공무원, 정치인, 군 장교들은 또 한 번 등장할 게 틀림없어 보인다.
재벌부터 보자. 경제인 단체인 전경련이 '정치인 로비를 재벌 그룹별로 할당해서 맡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반(反)대기업 정책이 많이 입법될 것 같으니 재벌 그룹이 정치인들을 나눠 맡아 후원금을 줘가며 설득하자는 요지다.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초 치고 간장 쳐서 돈벌이 방패막이 하자던 그 시절과 한 치 다를 게 없다. 여당의원 노랗게 굽고 야당의원 벌겋게 삶자는 거다. 국민들 눈에 도둑놈들로 비칠 수밖에 없다.
산같이 높은 의자에 앉아 말단 지방 부서 사람들 불러올려다 룸살롱에서 주지육림 접대받은 중앙 고급 공무원들, 그들 역시 낮에는 노 땡큐, 밤 살롱에서는 땡큐 땡큐였다. 이게 지식경제부만의 짓일 것인가. 금감원은 어땠고 감사원은 어땠던가. 그 사이 저축은행 사기에 걸려 약값, 월세 방값 떼인 서민들의 눈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높은 의자에 앉은 또 하나의 권력(검찰)까지 그 눈물을 닦아줄 능력은 못 보여주면서 국회 동행 명령에 콧방귀도 안 뀐다. 서민 눈물 닦아주자던 국정조사위는 검찰, 국회의원 기세 싸움판으로 변질된 채 파장이 다 됐다.
좌파 피의자가 법정에서 '김정일 장군님 만세'를 불러도 찍소리 없이 그냥 내보낸 권력(사법부)은 또 뭔가. 그런 물러터진 사법부의 이상한 사상적 이완 속에 전'현직 군 장성 장교들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군대의 생명인 군사기밀까지 예사로 빼돌려왔다. 지난 6년 동안 군사기밀 보호법을 위반한 장성, 장교 등만 40명. 그러나 실형 받고 감옥 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 군대의 모습이고 권부(權府)의 얼굴이다.
적(賊)은 배고파 빵 훔치는 서민 속에 있지 않다. 권력 뒤에 숨어 국익 해치고 서민 생존권 훔치고 외면하면 그게 바로 도적이다. 오적이 구적(九賊), 십이적(十二賊)으로 불어난 40년, 우리 모두 헛살았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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