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모든 복지시설 소방설비 설치 의무화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목이 따갑고 매캐한 냄새가 나서 밖에 있는 아줌마를 불렀는데 불이 나 깜짝 놀랐어요. 몸이 불편해 움직일 수 없었는데 다행히 아줌마가 밖으로 끌어내 줘 겨우 빠져 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어요."
11월 12일 발생한 포항 인덕노인요양센터 화재 참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김송이(88) 할머니는 아직도 당시를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사망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한 1층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다.
◆악몽에 시달리는 등 후유증=참사가 발생한 지 40여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김 할머니는 잠을 자다 벌떡 놀라 깨는 등 후유증을 겪고 있다. 김 할머니는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함께했던 할머니들이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데 대한 충격의 상처를 안은 채 지내고 있다. "가슴 한쪽이 벽돌로 짓누르고 있는 듯 답답함을 가눌 길이 없다"고 김 할머니는 고통을 호소했다.
김 할머니는 현재 포항시내 다른 요양시설에 입원해 생활하고 있는 상태다. 김 할머니의 며느리 박양란(44) 씨는 "화재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이지만 화재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다"며 "지금도 밤이 되면 전깃불을 켜놓고 주무실 정도로 공포감에 시달리고 계신다"고 말했다.
인덕요양센터 화재 참사는 11월 12일 오전 4시쯤 중증의 치매, 중풍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 불이 나 할머니 10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불은 요양센터 2층 건물 387㎡ 가운데 1층 사무실 16.5㎡를 태우고 40여분 만에 진화됐지만 화재로 발생한 유독연기가 1층 내부로 번지면서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 미처 대피하지 못해 인명피해가 컸다. 결국 어설픈 초기 대응과 노인요양시설에 대한 허술한 관리 등 안전 불감증까지 겹친 인재(人災)로 드러났다. 참사로 요양센터 원장인 L(65) 씨가 구속되고 L씨의 부인(64)과 화재 당시 1층에서 근무한 요양보호사 C(63·여) 씨가 불구속 입건됐다.
화재 참사가 인재라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근본적인 안전예방 대책이 서둘러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인덕요양센터는 현행 소방법상 화재경보기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돼 있다. 소방법에는 연면적 400㎡ 이상 건물에 대해서만 화재경보기를 설치하도록 돼 있어 이 요양센터는 연면적이 378㎡로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또 지난 2008년 소방법 개정으로 연면적 300㎡ 이상 600㎡ 미만의 노인요양시설은 간이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하지만 이 요양센터는 지난 2007년 1월부터 운영에 들어가 이마저 적용대상에서 빠졌다. 더구나 지난해 10월 실시된 소방실태 특별점검에서도 이상이 전혀 없다는 평가를 받아 지도·감독기관의 부실 행정도 질타를 받았다.
경북 지역 노인요양시설 360여 곳의 절반 가량이 강화된 소방 안전 기준을 적용받지 않는 300㎡ 이하 시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요양센터는 지난 1973년 포항시 남구 제철동사무소로 준공돼 사용하다 동사무소가 이전한 뒤 2006년 L씨가 인수해 리모델링을 거쳐 요양센터로 운영해 왔다.
◆복지시설 소방법 강화 계기=참사가 안타까운 인명을 앗아간 이후 전국의 요양시설에 대한 실태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소방법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앞으로 사회복지시설의 경우 면적에 상관없이 간이 스프링클러와 자동화재탐지설비, 소방서로 통보되는 자동화재속보기 설치가 의무화된다.
소방방재청은 현재 개정 중인 법안에 대해 공청회를 거쳐 이르면 내년 2월부터 개정된 소방법을 시행한다는 방침이다. 또 요양보호사 등 사회복지시설 근무자에 대한 안전교육 규정도 강화될 예정이다.
사회복지분야 전문가들은 "정부가 노인요양법을 도입하면서 여러 재난사고를 예방할 법과 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서둘러 시행했다"면서 "늦었지만 이번을 계기로 관련법이 강화될 예정이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참사 이후 갈등을 빚어왔던 유가족에 대한 보상 문제는 조만간 매듭지어질 전망이다.
최근 포항시의 중재 하에 벌인 보상금 협의에서 유가족 10명 가운데 7명이 희생자 1인당 1천440만원 선에 보상에 합의했다. 보상금은 1인당 화재보험료에서 940만원과 요양센터원장이 540만원을 각각 부담해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항시는 나머지 3명과 이르면 올해 안으로 합의를 이끌어 낼 것으로 보여 보상문제는 원만히 타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김 할머니와 같이 생존한 부상자에 대한 보상은 기대밖이라는 것이 가족들의 항변이다. 부상자 16명의 병원비는 1인당 540만원으로 보험사가 지불했으나 위로금은 터무니없는 액수여서 수긍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 할머니의 며느리 박 씨는 "사망자에 대해서는 보상협의가 원만히 진행 중인데 반해 어머니처럼 생존하시거나 부상당한 분들에 대한 현실적인 보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새로운 요양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어 치료비도 더 많이 드는데다 쉽게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하시는데 정부와 포항시가 적극 나서 살아남은 분들에 대한 위로에도 최선을 다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포항·이상원기자 seagul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