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육영수의 사랑속에 1952년 첫딸 박근혜 태어나
박정희와 육영수는 1950년 12월 12일 오후 대구 중구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의 가족으로는 큰형 박동희, 조카 박재석, 질녀 박영옥이 참석했고, 신부의 가족으로는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가 참석했다. 아버지 육종관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집안도 알아보지 않고 딸을 치우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고 반대하며 참석하지 않았다. 그로 해서 이경령은 딸의 편을 들기로 결심했고,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으며 그때부터 육영수와 함께 살게 되었다.
신부는 신랑의 대구사범학교 은사인 김영기 선생의 인도로 식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김재춘 중령의 부인 장봉희가 신부의 들러리를 섰다. 주례는 초대 대구시장인 허억(許億)이 맡았는데, 이전에 신랑, 신부와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주례사를 하면서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하고 서두를 떼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송재천 중위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물 교환을 위해 마련한 반지를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찾아보니 그게 없었다. 급한 마음에 김재춘에게 돈을 타서 반지를 다시 사와 무사히 예식을 마쳤으나 나중에 찾아보니 시계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데 애썼던 대구사범 동기생 이성조의 회고는 이랬다.
"하객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고, 피로연은 조촐했다. 전란 중이라 동기생들이 호주머니를 털어서 성당 뒤편에 상을 차렸고, 순수한 우정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결혼식이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는데, 전쟁 중에 다들 갈 길이 바빴다."
박정희는 9사단 사령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옮겨오자 살림집을 얻어 두었다. 그 집은 옛 동인호텔 입구에 있었는데, 이정우(李正雨)의 집 사랑채로 방이 세 개였다. 그 가운데 큰방은 박정희가 썼고, 두 번째 방은 이경령과 육영수'육예수, 그리고 세 번째 방은 운전병과 부관이 썼으며, 부엌이 없어서 현관을 개조해 부엌으로 사용하였다. 새색시 육영수는 집안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박정희로서는 처음으로 안락한 가정생활의 행복을 누렸다.
이쯤에서 육영수의 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개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둘째 딸이 미래의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 뒤로는 사위를 만나주지 않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 같은 고집을 꺾지 않았으며, 1965년 일흔 둘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93년 충부 옥천군 능월리에서 대지주 육용필의 5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세월이 많이 흘러 열여섯 살에 두 살 아래인 경주 이 씨 집안의 경령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육영수는 큰언니 육인순과는 열한 살, 오빠 육인수와는 일곱 살, 막내 동생 육예수와는 네 살 터울이었다.
육종관은 그의 형들이 출향해서 출세하자 자신은 고향에 남아서 집안의 재산을 관리했다. 미곡도매상'금광'인삼 가공업으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당시 '3정승집'이라 불리던 교동의 고가를 구입한 뒤 대궐 같은 저택으로 증축했다.
대지가 9천920㎡(3천 평)나 되는 집이었는데, 뒤뜰 역할을 하는 과수원까지 합하면 2만6천450㎡(8천 평)나 되었다. 거기다 사랑채는 고을 원이 일을 보던 동헌(東軒)처럼 꾸몄고, 그 저택을 자신의 왕국처럼 다스렸다. 그리고 돈을 끔찍이 아꼈다. 그런가 하면 돈을 빨리 세는 사람을 건방지다며 싫어했고, 그 다음으로 군인을 싫어했다.
뒷날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친인척들의 집에 경찰관을 배치하였다. 이권청탁을 비롯한 비리에 휘말리는 것을 감시토록 하려는 뜻이었다. 서울에 살던 장인 육종관의 집 앞에도 경찰이 진을 쳤다. 그러자 이경령이 자주 출입하는 친척집에 가서 "형사들이 우리 집에 와 앉아 있으니 성가셔 죽겠다. 너희 외숙모(육영수)에게 이야기해서 제발 형사들 보내지 말도록 하라"며 불평하였다. 그 말이 박정희에게 전달되어 감시가 풀렸다.
1951년 3월, 9사단은 3군단의 예비부대로 전환되었다. 당시 사단 사령부는 강릉의 남쪽에 있었고, 다소의 시간 여유가 생겼으며, 그해 4월 15일 박정희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며칠 뒤 박정희는 연락병을 보내 대구에 있던 육영수를 군용 앰뷸런스에 태워 데리고 갔다.
육영수는 남편의 어깨에 무궁화 세 개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어머, 참모장님 계급장이 달라졌나 보네요" 하며 좋아했다. 두 사람은 뒤늦게 신혼여행을 즐겼고, 그 뒤 1952년 2월 2일 첫딸 박근혜가 태어났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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